우리는 휴식을 통해 작은 기쁨과 충만감을 찾을 수 있다
Scene #1.[어떤 요양원]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추석연휴를 맞아 요양원에 있는 친지를 찾아뵀다. 아흔이 훌쩍 넘은 나이인지라 다리에 힘이 없어 걷지를 못한다. 정신은 멀쩡하다 못해 또렷하다. 과거의 일은 당연히 기억한다. 최근 요양원을 찾은 자식들한테 들었음직한 이야기를 동행한 자신의 동생에게 물어 확인할 정도다. 걷을 수가 없으니 움직이는 걸 질색한다. 아주 가끔 휠체어를 타고 공동 생활공간에 나와 잠시 동안 TV를 시청하는 것이 전부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며 요양원 담당 직원한테 침대에 뉘여 달라고 성깔을 부린다. 직원들이 “자꾸 손과 발,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굳는다”라고 하면 혼잣말로 “지랄하고 있네. 내가 움직이기 싫어서 그런거야.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그런거지!” 한다.
마음대로 몸은 움직여주질 않는데, 정신은 멀쩡하다. 나는 고통이 느껴졌다. 몸의 통증이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苦痛)이 전해져왔다. 나의 심신이 쓰리고 아파왔다. 예방(豫防)과는 무관하게 연로해지면서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이니. 감옥과 같은 침대를 벗어날 수가 없는 신세였다.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라고는 찾아봐도 없다. 요양원이 답일 수밖에. 그렇다고 집에 누워 있는다고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다. 가족한테마저 수발의 고통을 닥칠 뿐이다. 그저 요양원이 남아 있는 삶의 휴게소이다.
급 우울해졌다. 100세 시대에 대해서 생각했다. 과연 100세 시대는 인간에게 축복인가! 친지를 보면서 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고통과 불안, 우울이 삼위일체가 돼 엄습해온다.
Scene #2. [어떤 집] 연휴 내내 부부와 아들은 집에 있다. 아내는 부엌에 있는 시간이 많다. 아빠는 안방과 거실을 오갔다. 아들은 자기 방에 있다. 문은 꼭 닫고서. 아내가 부엌일을 마친다. 안방으로 향한다. 무척 피곤하겠다 싶다. 아빠는 안방의 침대를 아내에게 내주고 거실로 향한다. TV 리모컨을 찾는다. 항상 제 자리에 없다. 하긴 정해진 자리가 없으니. TV 바로 앞에 있으면 아내가, 소파의 방석과 쿠션 틈바구니에 있으면 아들이, 거실 테이블 위에 있으면 아빠의 지문 흔적이 남아있을 거다.
사람은 각자가 선호하는 공간이 있다. 아내는 안방의 침대, 아들은 자기 방 의자나 침대, 아빠는 거실 소파. 서로의 공간은 상대방에 의해 잠시 바뀐다. 아내의 침대는 가끔 아빠에게, 아빠의 거실은 아내에게, 아들의 방은 엄마에게.
하지만 누구에게든 침범을 받지 않는 영역이 있다. 바로 화장실이다. 문을 걸어 잠그고 볼일을 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화장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용무를 보고나서도 한참을 앉아 있게 된다. 그 때에 맘은 참 편하다. 자동차 운전석도 화장실만큼 아늑하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선 한참을 앉아 있다. FM라디오에서 나오는 사연과 음악을 듣는다. 아내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고나서야 운전석에서 내린다.
사람들에게 집이란?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뿐이오!’라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집이라는 큰 공간 보다는 화장실이나 자동차 같은 작은 공간이 오히려 평화롭다.
Scene #3. [고향] 올 추석도 마찬가지였다. 고속도로의 자동차 행렬은 길게 늘어섰다. 고향을 찾아가는 명절의 익숙한, 결코 변하지 않는 풍경이다. 얼룩빼기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울고, 초라한 지붕 밑 흐린 불빛 아래 도란도란 가족들이 속삭이는 곳이 고향이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에서 이쁜이 꽃뿐이가 모두 나와 반겨주는 곳이 고향이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그 누군가 말을 해도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향수를 달래려고 술이 취해 하는 말이라고, 그래서 타향은 싫고 고향이 좋다고 아우성치던 고향이다.
손에 들고 있는 선물 꾸러미만큼이나 큼지막한 추억을 그리며 찾아가는 곳이 고향이다. 짧은 명절 연휴에도 가족과 함께 즐기고 새롭게 충전을 받을 수 있는 곳이 고향이다. 언제든 찾아가면 보듬어 줄 있는 곳이 고향이다. 그래서 고향은 위대하고, 꿈엔들 잊힐 리가 없다. 그렇게 절절한 고향을, 우리는 한 해에 고작 두 번 정도 찾아간다.
이정하 시인의 시 ‘길을 가다가’를 읽어본다. “때로 삶이 힘겹고 지칠 때/ 잠시 멈춰 서서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걸어온 길을 한 번 둘러보라/ 편히 쉬고만 있었다면 과연 이만큼 올 수 있었겠는지// 힘겹고 지친 삶은/ 그 힘겹고 지친 것 때문에/ 더 풍요로울 수 있다/ 가파른 길에서 한숨 쉬는 사람들이여/ 눈앞의 언덕만 보지 말고/ 그 뒤에 펼쳐질 평원을 생각해보라/ 외려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 아닌지.”
누구에게나 고향과도 같은 자신 만의 휴게소가 필요하다. 힘들고 지칠 때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빛이 비춘 곳. 쓸쓸한 마음을 몰고 가도 기쁨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곳. 찾아가면 항상 마음의 상태가 밝아지고 유쾌한 상태로 돌아오는 곳. 이런 곳 말이다.
내 고향은 해남 땅끝이다. 떠나온 지가 어언 50년이 다 돼 간다. 유난히 그리울 때 읊는 시가 있다. 김경윤 시인의 ‘그대 땅 끝에 오시려거든’이다. “그대 땅 끝에 오시려거든/ 일상의 남루 죄다 벗어버리고/ 빈 몸 빈 마음으로 오시게나/ 행여 시간에 쫓기더라도 지름길일랑 찾지 말고/ 그저 서해로 기우는 저문 해를 이정표 삼아/ 산다랑치 논에 소를 몰 듯 그렇게 고삐를 늦추고 오시게나.” 시인은 무거은 삶의 거죽을 훌훌 털어내고, 평온한 안식처를 찾아오라는 것이다.
집 말고, 화장실 말고, 나의 또 다른 휴게소인 자동차 운전석에 올라탔다. 차를 몰고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까치들이 아슬아슬하게 땅 위에 앉아 있다.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듣고 뒤뚱뒤뚱 뛰다가 날아올랐다. 산 속 보다는 회색빛 아파트 앞마당이 까치의 휴게소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틈 속에서 무심한 듯 먹이를 찾는 것이 까치가 덜 우울해지는 방법일 수 있으니.
사람은 어떤가? 자신 만의 휴게소가 없다. 하얀 백지에 이 색을 칠하고 저 색을 칠해서 온통 검정색이 돼버린 삶 속에서도 쉴 공간이 하나 없다. 휴식의 가치는 잊혀지고, 내면의 빛은 어둡기만 하다.
사람은 쉬지 않고 편안한 감정을 느낄 수 없다. 윈스턴 처칠은 일생 동안 철저하게 지킨 규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휴식이다. 처칠은 점심식사를 한 후 반드시 한 두 시간씩 낮잠을 잤다. 의도적으로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해군장관 시절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영국을 공격하는 상황에서도 점심식사 후 작전본부 안 자신의 방에서 낮잠을 잤다.
휴식은 노는 게 아니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아니다. 삶의 자세를 점검하고 생활을 돌아보는,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시간이다. 우리는 휴식을 통해 작은 기쁨과 충만감을 찾을 수 있다. 일상의 ‘애씀’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여 생명의 기운을 다시 채울 수 있다.
전설의 영국 그룹 비틀즈(The Beatles)의 멤버 존 레넌은 1966년에 발매된 ‘Revolver’라는 앨범에 수록된 ‘나는 잠을 잘 뿐이야(I'm only sleeping)’라는 곡의 가사를 이렇게 썼다. “Everybody seems to think I'm lazy. I don't mind, I think they're crazy. Running everywhere at such a speed. Till they find there's no need.(모두들 내가 게으르다고 하지. 신경 안 써, 난 그들이 바보라고 생각해.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는 깨닫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지.”
도대체 나의 휴게소는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