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어떻게 해서든 언어로 만들어야... 그리움이 대상이 되는 언어로
인생을 돌아보면 그리운 사람들이 수없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술을 한 잔 하고 나면 더해진다. 진한 인연이었지만 지금은 소식조차 들을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찰나와 같은 순간에 만났던 인연이 죽지 않고 살아 이어지기도 한다.
며칠 전, 모처럼 후배를 만나 술자리를 갖고 지하철로 귀가 중이었다. 페이스북 친구로 인연을 맺은 일본 도쿄에 거주하고 있는 선배한테 영상전화가 왔다. 몇 차례 통화에 실패하고는 겨우 연결됐다. 화면에 나타난 선배 역시 거나하게 취한 얼굴이었다. 첫 마디는 이랬다.
“야, 이제 얼굴을 봤으니까 선배가 아니라 형이다. 형이라 불러!”
“예, 형님.”
내려야 할 역 보다 몇 개 앞서 하차하여 통화는 30분 동안이나 이어졌다. 나눴던 대화라고 해봤자 뜰채에 걸러지지 않는, 그냥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분명히 대화 속에는 ‘그리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올해 1월 하순에 엄마가 사랑하는 가족 곁을 떠나셨다. 좀체 추슬러지지 않는 마음을 겨우 달래가며 유품을 정리하기로 했다. 도저히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것 같아 유품정리 업체의 도움을 받았다. 직접 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업체의 도움이 있었어도 엄마의 물건들을 정리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큰 아픔이었다.
곳곳에 엄마의 손때가 가득한 유품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큰 고통이 따랐다. 여전히 엄마는 방에 계신 것 같았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부엌에서 아들에게 내어주실 엄마의 밥상을 준비하고 계신 것 같았다.
현실의 직시는 바로 눈물로 이어졌다. 유품 정리가 마치 그리움을 없애는 작업처럼 느껴졌다.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고개만 절래절래 흔들었다.
나는 꽤 오래전에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다. 출생부터 쓰기 시작한 육아일기 등 가족의 생활 모습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엮은 책이었다.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테이블 위에 성경책과 함께 놓여있는 그 책을 발견했다. 표지는 많이 낡았고, 구겨져 있었다. 엄마 손길의 흔적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책을 들어 코에 갖다 대었다. 책 냄새는 사라졌고 엄마의 냄새는 맡을 수 없었지만 여기저기 손때가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책을 펼쳐보았다. 중간 지점에서 페이지의 반쪽이 접혀 있었다. 엄마가 여기까지 읽으셨다는 표시일 거라 짐작했다. 꽤 두꺼운 책이었는데, 중간 정도까지 읽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동안 책을 쓰다듬으면서 소리 내어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어떤 대답도 없었다. 울음은 아주 오랫동안 그쳐지지 않았다. 그리움에 비례한 것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유품을 정리하던 업체 직원이 나를 토닥여주었다.
“이 책을 다 읽으실 때까지만 살아 계셨어도….”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책의 중간 이후쯤이면 아이들이 걷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유치원에 다니고 초등학생이 되고, 중학생이 되면서, 할머니와 손자들의 울고 웃는 이야기들이 더 많아진다. 접어져 있는 그 이상을 읽으셨다면 엄마는 지난날의 추억을 회상하실 수 있었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손자는 지난 5월 가정의 달에 들어 있는 외할머니 생일을 맞아 꽃다발을 안겨드렸다. 외할머니는 정말 좋아하셨다. 기록으로 남겼으면 싶다 하셔서 사진을 찍어드렸다. 외할머니의 미소는 얼굴 한가득을 차지했다. 아내가 말했다. “엄마는 외손자가 꽃다발을 안겨주는 첫 번째 여인입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또다시 엄마가 생각났다. 그리고서 혼자 말했다. “엄마가 손자한테 꽃 선물을 받았다면 감동의 눈물로 꽃에 물을 주었을텐데….”라고. ‘엄마가 가장 사랑했던 손자였는데’, 잠시동안 침묵이 언어가 됐다.
엄마가 떠나신 지 넉 달이 됐다. 나는 그 사실을 엄마한테 전화를 하고서야 알게 됐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는 매일 점심식사를 하실 무렵에 전화를 드렸다. 식사 여부를 묻고, 무엇을 드셨는지 알아보고, 목소리를 살펴보려는 나름대로 체크 방법이었다.
어제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예, 여보세요!”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순간 깜짝 놀랐다.
“저희 엄마 핸드폰인데…”
“아, 이 폰 번호를 사용한지 한 4개월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엄마가 돌아가신, 지나간 세월을 자로 잴 수 있었다. 내가 엄마의 핸드폰을 갖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엄마와 소통했던 전화기가 나에게 있다는 사실에 다시 그리움이 찾아왔다.
주말에 산에 올랐다. 엄마가 입원하고 계실 때 들려드리려고 다운받아 놓았던 이미자 노래를 들었다. 엄마는 이미자 선생을 좋아하셨다. 노래를 제법 잘 하셨다. 고향 동네의 가수였다. 2년 전 목포 여행할 때 노래방에서 이미자 노래 만을 수십 곡을 부르셨다.
생전에 두 번에 걸쳐 이미자 공연을 관람시켜 드렸다. 공연이 끝나면 엄마의 언어는 매번 같았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좋다.”였다.
나는 귓속으로 들려오는 가사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견딜 수가 없도록 외로워도 슬퍼도/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만 한다고/ 내 스스로 내 마음을 달래어 가면서/ 비탈진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노래에는 엄마의 삶이 고스란히 들어있다고 느껴졌다. 여전히 이미자 선생의 노래를 엄마와 함께 듣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신 엄마의 삶을 이미자 선생이 노래한 것 같았다. 나는 호흡을 길게 했다. 사모곡(思母曲)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 이미자의 노래는 그리움의 언어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도 종종 이미자의 노래를 들을 것이고, 따라 부를 것이다. 물론 항상 엄마와 함께 말이다. 그것이 그리운 엄마한테 다가가는 나의 방식이기도 하니까.
그리움은 어떻게 해서든 언어로 만들어야 한다. 대상이 없는 언어가 아니라 그리움이 대상이 되는 언어로. 그리움이 생기면 그 언어를 불러내고, 또 그리움이 생기면 그 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끔.
나는 서서히 눈물 만이 그리움의 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그리움의 언어를 만들어 그리움의 대상한테 다가가는 것이 결국 그리움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당신’한테 자신이 그리워하고 있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야 덜 외로워질 수 있고, 그리움의 초상화인 어떤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는 방법이다. 그리움의 언어는 눈물로 만들어진 진주처럼, 영롱할 것이다. 그리운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