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꿈을 꾸기 시작해야겠습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마치 겨울의 울음같이 내립니다. 얼어붙은 대지를 때리는 하늘의 채찍처럼 말입니다, 세상을 적시는 비와 한 몸이 되어 봄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마음이 겨울 청소를 합니다.
한 잎 없는 나무에 파란 새순을 재촉하는 비가 선물처럼 내립니다. 겨울 내내 고생했던 해도 쉬어가라는 빛의 눈물처럼 말입니다. 한번 쯤 눈을 감고 삶의 공식을 풀어보고, 늦은 겨울 비 이른 봄비가 봄날의 인생수업을 미리 점검하라는 수강신청시기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꽃처럼 살자!’는 강의에 수강신청을 마쳤습니다. ‘실라버스(Syllabus)’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걸어 온 길을 끊임없이 뒤돌아봐도 남는 건 후회가 반입니다. 그러나 다시 길을 걷는 것이 인생입니다. 뚜벅뚜벅 걸어가며 차곡차곡 사람과의 희망을 쌓고 살다가 때로는 희망이 허물어지는 모습까지도 보게 되는 것이 사람의 삶이지요. 인생의 노트에 그려진 명령대로 살아가면서 다가오는 나의 일들을 맞이하다가 떠날 때가 되면 떠나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고는 내게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면 처음인 듯 웃어주자고요. 인생의 길이란 도망갈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꽃처럼 살자! 노란 색깔 개나리, 곧 흐드러질 벚꽃, 그들의 꽃잎 수 만큼 꽃 같은 삶이 그립습니다.’
수강신청을 마치고 촉촉이 젖어있는 아파트 흙길을 걸었습니다. 내리는 비가 나무를 때립니다. ‘대지여, 곧 깨어나라!’는 명령 같습니다. 비를 받아들이는 오랜 시간 퇴색한 겨울 나뭇잎들이 갈색 흙들 위에서 유화처럼 두텁게 숨죽이고 있습니다. 겨울 잎들로 흙은 자취가 미궁이지만 이내 곧 파란 새싹들이 흙의 위대함을 공표할 것입니다.
자고로 흙은 여인의 품속 같아서 가냘퍼 보입니다. 누구를 만나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은 흙이지만, 그래도 봄이 되면 누구를 만날까 고민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메아리가 없더라도 늘 사랑의 그리움을 하소연하는 것 처럼요. 그 흙들의 그리움이 이내 파릇파릇 풀들과 노란 수선화 같은 꽃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흙은 비 때문에 질퍽이는 풍경을 연출하지만 꽃이 필 날들의 기대감으로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냅니다. 사뿐히 밟아도 푹신합니다. 푹신함은 봄날이 오면 솟아 나올 화초들의 침대가 되겠지요, 이내 곧 말입니다.
어느 해 봄날에 일본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나가노현 마츠모토시에 있는 마츠모토성에 갔었는데, 성은 1504년 축성돼 일본에서 목조 천수각으로 가장 오래된 국보입니다. 마츠모토성 근처 작은 공원 벤치에 삼삼오오 앉아있는 할머니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초고령사회에 가장 먼저 진입한 일본의 한 면을 보고 봄이 떠난 인생의 삶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긴 겨울을 지내고 이른 봄볕에 온몸을 비추어주는 일광욕의 효과가 온천수에 몸을 담그는 것 보다 나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봄볕에 몸을 데우는 그들이 이른 봄 볕 아래에서 청춘의 아름다움을 추억을 회상하는 시간인 것 같았습니다.
사람은 앞을 내다보는 것보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에 더 익숙하니까요. 결국 옛날이 흘러 다시 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이고, 그것이 사랑이건 이별이건 모두가 동그라미 처럼 만나고 만나고 또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일본말을 알아 듣지는 못 했지만, 두런두런 들려오는 단어들이 그 때 그 봄날의 언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봄날의 따스한 볕 아래 노인들의 모습은 마치 곧 다가올 나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할 때 버스 안에서 봄날의 개똥철학을 적었습니다.
인생을 돌아봅니다.
용서를 해 줬던 일 보다는
용서를 받은 일들이 더 많습니다.
감사를 받았던 일 보다는
감사를 표현했던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봄볕을 쬐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해봅니다.
젊음과 늙음의 차이는
현재와 과거의 차이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지금을 바라보고 있어
과거에 대한 것들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았던 일들을 잊어버리고,
감사를 말했던 일들을 잊어버리고요.
용서했던 일보다는 용서를 받았던 일들을,
감사했던 일보다는 감사를 받았던 일들을,
우리의 기억에서 놓치지 않을 때,
인생은 훨씬 행복해질텐데 말입니다.
이른 봄비가 그치자 길을 걸었습니다. 머리 위에서 새 한 마리가 지저귑니다. 청량한 음색은 ‘이제 봄’이라서 일까요. 듣기가 좋았습니다. 어떤 새인가 궁금했습니다. 고개를 들었습니다. 새는, 이내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순간, 후회가 머리를 스쳤습니다. 괜한 욕심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지나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면, 내 앞에서 시작한 기분 좋은 새소리가 뒷전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텐데 말이예요.
역시 욕심은 상황을 중도에 멈추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심없이 걷다가 새소리에 대한 소유욕이 결국 ‘무無’를 만들었으니까요. 그래서 법정 스님은 이렇게 말했나 봅니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니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새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의 욕심을 말입니다. 그래서 서슴없이 날아간 것이겠지요. 새가 주는 일침이 이른 봄의 몽롱한 기운을 깨트립니다. 새들은 알고 있는데,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곧 봄이 오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요? 이제 봄 봄 봄입니다. 봄날의 꿈을 꾸기 시작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