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희망의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의 삶이다

by 별통

#1. 오늘도 새벽 산에 올랐다. 바람의 찬 기운과 함께 나뭇잎의 마른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신선하고 짜릿하다. 더위가 물러갈 무렵부터 시작한 새벽 등산이다. 시골마을 앞에 동산 수준의 등성이지만, 나지막한 꼭대기에 오르면 성취감에 뿌듯하다.

적지 않는 동네 사람들이 이미 정상을 점령했다. 하얀 입김을 품어내며 배드민턴을 치는 중년 부부의 모습. 속보로 주변을 돌며 외쳐 대는 늙수그레하게 보이는 아저씨의 아침 인사는 구호처럼 우렁차다. 그랬다. 새벽 산에 오른 사람들은 나이 드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새벽의 빛줄기로는 그들 인생의 성공과 실패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비즈니스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 중 하나를 가져다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세월과 나이. 그것은 사람들에게 추억을 만들고 사랑을 만들어준다. 때론 세월은 경험과 후회를 동반하기도 한다. 그래서 젊은 시절 천덕꾸러기가 철들었을 땐 이미 머리카락이 하얘졌다고 하지 않든가. 경험과 후회를 밑천삼아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세월이요 인생이다. 빈 잔을 채우듯 신중하게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여명이 밝아올 무렵 산을 내려왔다. 잠에 막 깬 듯한 까치의 기분 좋은 노래 소리가 시계의 초침처럼 들려 왔다. 오늘 하루도 성공한 인생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출근길에 나선다.


#2. 출근길은 항상 바쁘다. 서둘러 지하철에 올라탔다. 정거장을 거치면서 나를 둘러싼 공간의 여유가 점점 좁아져온다. 70대 초반의 신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서슴없이 노약자석으로 옮겨 않는다. 일상에 지친 자식 같은 직장인을 배려한 안드로메다급 코드다. 목적지 전철역에서 내려섰다. 갈 길을 재촉했다. 에스컬레이터는 사람들로 엉키고, 그래서 붐빈다. 옆쪽 계단으로 향했다. 두 발을 올리고는 이내 멈춰 섰다. “아차! 계단이구나.” 안드로메다급 별난 행동이다.

안디로메다급 성공학이 있다. 안드로메다 성운은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 철이가 인간의 몸을 얻고자 여행하는 곳이다. 상식 수준과 일치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일삼는 사람의 성향을 ‘안드로메다 코드’라 부른다. 이 은하의 코드가 지구 사람들을 웃겨준다. 천성 따라 살지 않고 ‘감’을 잡아 삶을 사는 안드로메다 코더.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웃겨주는 안드로메다 코더. 그 코드를 사는 사람은 고해(苦海)라 해도 타인을 행복하게 해줘 인기다. 안드로메다 모델의 ‘엉뚱’과 ‘기발’은 웃음과 환희로 세상을 밝혀주는 보시(布施)이자 삶의 윤활유이다. 슬퍼도 웃을 수 있는 인생이 아름답다. 꽃은 질 때가 되어도 슬퍼하지 않는다.


#3. 가을꽃 중에 ‘꽃며느리밥풀’이 있다. 꽃 이름의 탄생은 이렇다. 가난한 농가의 며느리는 제사상에 올릴 밥을 준비하다 쌀알 두 개를 떨어뜨렸다. 흙이 묻은 쌀로 밥을 지을 수 없다고 판단한 며느리는 버리기가 아까워 입에 넣었다. 제삿밥 쌀을 입에 댔다는 이유로 시댁에서 쫓겨나고, 며느리는 이내 목을 매고 만다. 며느리의 넋은 꽃으로 환생했다. 혓바닥처럼 생긴 붉은 꽃잎 한 가운데에는 두 개의 쌀알 같은 흰 점이 있다. 이 꽃이 바로 꽃며느리밥풀이다.

이 꽃의 슬픈 사연처럼 가을은 외로움과 고독의 계절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가을꽃들의 꽃말을 보면 알 수 있다. 국화의 꽃말은 맑음, 고상함이다. 동요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누나가 좋아했던 과꽃의 꽃말은 신념이고, 맨드라미는 열정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가을이면 하늘하늘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꽃, 코스모스의 꽃말은 소녀의 순정이라고 한다. 이름 있는 꽃들은 전설이나 설화가 있다. 하지만 코스모스는 그렇지 않다. 신(神 )이 가장 먼저 습작으로 만든 꽃이 코스모스란다. 그래서일까, 가냘프게 보인다. 흡족하지 못한 신은 여러 종류의 코스모스를 추가로 만들었다. 최후에 만들어진 꽃이 국화다. 코스모스도 국화과로 분류된다.

꽃이 있어 가장 아름다운 약속은 역시 희망이다. 낙엽과 황혼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가을에도 희망을 품은 씨앗이 꽃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희망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4. 가을여행은 더욱 신이 난다. 살다 보면 탈출을 몸서리치게 꿈꿀 때가 있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노숙인의 자유가, 살찐 도시 비둘기의 느릿한 비상이, 별을 벗 삼아 걷는 무전인(無錢人)이, 자전거 두 바퀴에 의지해 굴러다니는 방랑자의 한 마디까지 부럽다. 파란하늘 흰 구름에 미칠 것 같은 계절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들녘의 곡식들이 추수를 끝내고 마시멜로(볏짚말이)가 됐다. 농한기. 인생의 심호흡을 할 때가 지금이다. 세상사람 모두가 떠나고, 자유와 탈출을 하기 위한 딱 좋은 시기다. 정말 떠나고 싶을 때다. 감탄의 순간에 빠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뒤돌아보지 마라. 계산하지 마라. 따지지 마라. 날숨을 위한 여행에 빠질 수 없다. 아무 곳에도 갈수 없게 된다. 자유의 모습이 흘낏 보이면 떠날 뿐이다.

자연 냄새 나는 풍경도 좋다. 땀내 나는 사람들의 세상도 괜찮다. 시절은 곧 불꽃처럼 흘러간다. 밤하늘 불꽃같은 여행을 떠나라. 좀 아수라장이면 어떠랴. 여행으로 업그레이드된 삶을 만든다는 꿈을 갖고 떠나라.

여행은 인간의 본능이다. 자아를 찾아 본질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야 더욱 좋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더욱 오지고 찰지다. 여행의 시작은 내 사랑의 시작할 수 있다. 여행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미움의 흔적일랑 모두 지워라. 세상의 온갖 별들이 내 맘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 숫자만큼 추억이 쌓인다.



#5. 추억계좌를 만들어 본다. 아침 길이다. 얼굴에 와 닿은 바람소리가 제법 차갑다. 시원한 기운이 품으로 기어든다. 아직은 선선하다. 가을이 떠나고 있다. 사람들의 표정이 어제보다 밝아졌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파란 빛이 시선을 빼앗는다. 그 빛에 눈이 시리다. 지난날의 이야기를 추억계좌에 담아 압축한다.

세월은 도둑처럼 온다더니 떠나는 것도 살금 살금이다. 엄마의 치마처럼 갈바람이 연신 살랑거린다. 계절 사이에 있는 세상 빛이 곱다. 길 위에 물었다. “세월은 빠르더냐?” 말이 없다. 한 때 복사열을 내뿜는 아스팔트는 묵묵히 삶의 굳은 살 만을 보여주고 있다. 삶이, 세월이 끊임없이 흐른다.

천지가 익어가던 계절도 이제 뒷모습이다. 곡식도 열매도 주인을 찾아 떠난 지금. 인생 계좌를 열어본다. 이제라도 풍성함과 울긋불긋 단풍의 멋스러움이라도 담아야겠다. 인생의 계좌에 차곡차곡 추억이 쌓이고, 쌓인 추억은 한 권의 책이 된다. 세월은 가도 추억만은 남으니, 바람에 쌓이는 낙엽처럼 우리 인생은 웃는 추억이 쌓인다. 언제 어디서든 세상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기 마련이다.



* 2017년 10월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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