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시작하는 아침

by 민지울

밤이 되면 한바탕 전쟁이 일어난다. 내게는 매일 일어나는 작은 전쟁이다. 돌 무렵까지는 정말 피난 가야 할 전쟁이었지만 두 돌이 지나면서 점점 잔잔한 신경전이 되어갔다.

시금치를 먹냐 안 먹냐, 티브이를 보냐 안보냐, 블록을 치우냐 안 치우냐, 목욕을 하냐 안 하냐, 옷을 입냐 안 입냐, 사소해 보이지만 나에게는 하나하나 정복해야 할 고지이다. 거의 마지막 고지인 잠옷을 갈아입히기까지 오면 내 마음은 울그락 불그락이다. 장난기 가득한 아이와의 저녁은 정신없이 마무리가 되어가고 세 권까지 읽기로 타협한 책들을 가까스로 끝내면 사르르 아이는 꿈나라로 진입한다.

바쁜 남편은 아이가 잠자리에 들 때쯤 녹초가 되어 집으로 들어오곤 한다.

너도 나도 고단한 하루였구나!

아이를 재우기까지 모든 과정이 쉬운 것은 하나도 없다.

도망가는 아이에게 고함으로 응수하는 엄마의 고함이 윗집에서도 들려온다.

윗집 엄마도 아빠도 고단하구나!


아이가 더 어릴 때는 아이를 재우는 데 성공하면 맥주라도 한잔 하며 성공을 축하해야 할 것 같았다.

매일의 고지는 늘 내가 점령했지만 기진맥진한 엄마는 점점 맥주로도 위로가 안되었다.

이겼다는 승전보를 알릴 곳도 없고 거실에 나와 앉으면 해야 할 집안일들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난여름 즈음 전략을 바꿨다. 아이와의 전쟁이 끝나면 함께 잠들기로 했다.

대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못다 한 것들을 해 볼 작정이었다.

그렇게 별 뜻 없이 시작한 새벽 기상을 그럭저럭 지금까지 큰 이탈 없이 잘해오고 있었다.


새벽 5시에 기상한 내 몸은 피곤했지만 나만의 방에 문을 여는 순간, 또 다른 세상이 주는 기쁨이 컸다. 소박한 서재로 탈바꿈한 문간방이 언제나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듯 내 몸과 마음을 충전했다. 일기 쓰기, 책 뒤적이기, 스트레칭하다 보면 세 시간이 금방 갔다.

동이 트고 창밖이 환해지면 그제야 잠에서 깬 아이는 나를 찾아 눈을 비비며 방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사각사각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하던 일을 멈춘다.

10, 9, 8, 7, 6, 5, 4, 3, 2, 1, 삐~

'충전이 종료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너와의 시간에 on이라는 글자가 켜진다.

"아이고. 우리 아기 일어났어?"

행복한 아침의 시작!


그렇게 조화로워 보이던 새벽시간이 엉망이 되기 시작한 건 지난주부터였다. 하루 쉬어가자고 했는데 다음날도 쉬고, 자고나도 몸이 개운하지도 않고 마음은 더 불편했다. 처음에는 오른발, 왼발 잘 맞추다가 한번 어긋난 발이 결국 더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구호도 구령도 없이 아무 데나로 걸어가는 내 마음의 발걸음을 차마 멈추지는 못했다.

마지못해 일어난 아침 그야말로 멍하니 앉아있는데 아이가 사부작사부작 일어나 내게로 왔다.

"왜 벌써 일어났어?"

엄마도 아니고 나 자신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놓인 나.

사실 이런 때가 많다.

엄마로서 고백하자면 늘 나는 모자란 엄마다. 종종 방전되고 때로는 무기력하고 자주 집중하지 못했다.


보다 멋진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그와 동시에 점점 커지는 나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특히 새벽엔 더 그렇다.

이른 시각, 나는 평화로워 보이는 작은 방에서 또 다른 내면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그리고 고민거리들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지난 시간처럼 마냥 충전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엄마로서의 슬럼프는 조금 이겨냈지만 이제 나를 만나기 시작하자 내 안에서 슬럼프가 시작된 것 같다.

느리게 가는 마음, 빠르게 가는 시간. 종종걸음을 재촉하는 나의 에고.

엉켜가는 내 발걸음.


그러나 언제나처럼 결국 나를 이끄는 힘은 '굳은 의지'가 아닌 '내려놓은 마음'이다.

'엉킨 발걸음으로 걸으면 어때?' 하는 편안한 마음.

기대를 조금 내려두면 편하다.

오늘 아침이 완벽할 거라는 기대를 반 접고, 오늘 내가 완벽할 거라는 기대를 한번 더 접고 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어제보다 엉망이어도 된다. 어제보다 잘해도 된다.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그저 나의 길을 걸을 뿐이다. 엄마로서, 나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부족하지만 충분하다.

때로는 엉킨 발걸음, 때로는 길을 잃은 헤매는 마음으로.

걸어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늘 아침 다시 4시 반. 알람이 울리고 나는 눈을 뜬다.

일어날까 말까 고민을 하며 결국은 침대맡을 떠난다.

여전히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 방으로 온다.

고요가 나를 평화롭게 하는 완벽한 아침이다.

아이가 올 때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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