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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울 Jan 24. 2022

새해부터 잉여인간, 어쩌려고 그러니?

"엄마는 아까도 엄마 꺼 봤는데 또 보는 거야?"

다섯 살 된 아이도 TV를 스스로 끄는데 나는 도무지 보던 예능을 중간에 끊을 수가 없다.

"음... 엄마는 말이지..."

어디 도망갈 곳이 없다. 하지만 말을 꺼냈으니 마무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올해 마흔둘이 된 어느덧 중년의 어른이니까.

"엄마는 원래 잘 안보잖아."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아이는 이유를 수긍할 만큼 혹은 이유에 딴지를 걸 만큼이 안되었다. 혹은 너무나 순수해서 액면 그대로의 말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어른인 나와는 반대인 거다. TV는 내가 샀는데 아이가 허락하는 이 시추에이션이 이제 이상하지도 않다.


'목적과 방향을 제대로 찾기 위해서일까?'

'암막커튼으로 바꿔서인가?'

'부스터 샷을 맞아서일까?'

핑계는 자꾸 떠오른다. 사실 나는 그간 꾸준히 해오던 새벽 기상도 며칠 째 하지 못했다. 밤에는 늘어지게 TV 시청도 하고 싶다. 그냥 늘어지고만 싶다. 새해부터.


"엄마는 원래 잘 안보잖아."

나는 아이가 흔쾌히 허락해준 시청시간 동안 내가 댄 핑계를 곰곰 생각했다.

그럼 나는 '원래' 무엇을 했을까?

요리하고 밥 먹이고 설거지하고 집 정리 후에 아이 재우기 바빴지. 그런데 나는 워킹맘도 아니고, 집에서 부업을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따로 공부하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나는 사람 만나는 약속도 잘 잡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어느순간부터 계속 바빴다.

사실은 마음이 바빠졌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바빠진다는 것은 시간이 마음을 앞서갈 때이다. 글을 쓸 때는 그저 내가 좋아 쓰다 보니,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몰입해도 마음이 여유로웠다. 마음이 시간 속에 잘 안착해서 리듬을 타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할 때는 마음이 자꾸  앞선다. 혹은 마음이 저 뒤에 가 있다. 너무 잘하고 싶거나, 그냥 하기가 싫다. 그렇게 마음이 부대낄 때면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기는커녕 질책하곤 했다. '정신 차렷!' 스파르타식 훈련에 익숙해서일까? 축 늘어진 파김치가 된 나를 좋게 볼래야 좋게 봐줄 수가 없다.

'어쩜 나이가 들어서, 엄마가 되어서도 넌 변한 게 없냐 이 말이다.'

작년에 글을 쓰는 동안은 깊숙이 내면을 파고들었다. 나의 삶을 한 발자국 떨어져 유심히 보기도 했다. 그 시간을 통해 스스로를 한끝 더 알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르다. 나를 사랑하고자 결심한 것과 나를 사랑하는 것은 별개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도 작은 걸음조차 떼지 못한 것일까.


1월의 새날이 시작되고도 언 스무 다섯 날이 지났다. 새로운 결심으로 야심차게 등록한 수영 레슨은 아직 한 번도 가질 못했다. 그때마다 적절한 핑곗거리는 있었다. 그러나 솔직해지자. 나는 사실은 가기 싫었다. 가지못한 핑계를 대는 것은 득이 되지 못했다. 차라리 가고싶지 않은 내 마음을 인정하는 것이 나았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노트북만 챙겨 나와 중고 책방으로 향했다. 한층 더 따뜻해진 게 느껴졌다. 문득 아이가 오늘 아침 자신 있게 하던 말이 생각 났다.

"엄마, 뉴스에서 오늘 따뜻해진다고 했어."

"네가 벌써 뉴스를 알아들어?"

"그럼."

그저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였는데, 아이 말이 맞았다. 오늘 날씨는 아이가 말대로 훨씬 더 따뜻한다. 마치 봄 같다.

여러모로 아이는 어른보다 낫다.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온 마음으로 확신한다. 그래서 아이들의 세상에는 오류가 없다. 아이의 몸짓하나, 말하나가 나를 가르친다. 그동안 그토록 잉여인간으로 지냈던 나에게 말한다. 그냥 투명하게 나를 받아주라고 말이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잖아. 그간 추웠잖니. 그간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갔잖니.'

곰이 아닌 인간인데 참 미련하기도 한 나이기에 그렇겠지. 곰같은 내게도 겨울잠이 필요했던 거구나. 김치가 장독대 안에서 푹 삭듯, 잠들어 깨어날 줄 모르는 곰처럼 쉼이 필요했구나.


"너무 바빠서..."라는 말은 언제나 유용한 핑곗거리가 될지 모른다. 오늘도 바쁘고 내일도 바빠 쉬지 못하고 놀지 못할 아주 좋은 핑곗거리 말이다. 하지만 매일이 그토록 바쁘기에 어떠한 영감도 숨 쉬지 못하고 어떠한 충만감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과연 나에게 좋은 것일까? 그럴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휴식이 필요하다. 휴식은 나를 칭찬하는 시간이다. 게을러도, 무능해도, 실수해도 나를 칭찬하는 시간이다. 충분히 내 몸과 마음을 칭찬해줄 때 나는 쉼에서 깨어난다. 쉼을 끝내고 다시 살아가는 것. 그리고 다시 살다가 또 쉬는 것. 쉼과 삶, 두 가지의 버튼이 잘 작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쉴 때 살고, 살 때 쉰다. 그리고 망가짐을 못 느끼고 계속 가다가 결국 계속 '방전'이나 '고장'이라는 결말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 모드가 스위치 켜듯 확실히 구별되면 어떨까? 그건 아마 AI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우리는 사람이기에 하나의 모드에서 또 다른 모드로 전환될 때 나도 모르는 불안에 휩싸이기도 하고, 자책감을 느끼기도 하며 때로는 이게 모드 전환 인지도 잘 모를 때가 있다. 하지만 사람이기에 나도 모르게 스며들듯 변한다. 그러한 과정을 우리는 한 단어로 '방황'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것 아는가? 방황할 때 우리는 성장한다. 그동안의 축적이 소화되어 또 다른 나로 성장하는 시간.

누구나 살다 보면 내 몸과 마음이 의지와 다르게 작동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더 달리는 사람도 있고, 그저 푹 꺼져 있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느 쪽에 속할까? 어느 쪽이든 나는 이제 잉여인간으로 사는 나의 모습도 받아주고 싶다. 투명하게 스스로를 인정해주고 포용하는 것도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우리는 휴식이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휴식은 곧 회복인 것이다.
짧은 시간의 휴식일지라도 회복시키는 힘은 상상 이상으로 큰 것이니
단 5분만이라도 휴식으로 피로를 풀어야 한다.

-데일 카네기-



휴식은 곧 회복이다. 제대로 된 휴식은 회복과 더불어 성장을 가져온다. 숙성되고 발효되는 시간을 거쳐 우리는 또 다른 나로 진화되는 것이다. 그런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새벽 기상은 못했지만, 수영장 근처도 못 갔지만, 비록 이 시기가 새해의 중요한 시작 시점이지만, 나는 제대로 휴식한 것인지도 모른다.


열심히 뛰고 열심히 고민하고 열심히 썼던 시간 뒤에 달콤했던 휴식을 취하는 나 자신을 아이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줄 것. 쉬는 동안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뿐이었다. 아이의 허락처럼 투명하게.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나 자신에 쿨하게 투명하게 휴식을 허해도 된다.

그게 비록 새해 첫 날 부터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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