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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니아 Apr 21. 2019

로맹 가리와의 첫 만남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

페루는 아직 못 가 봤다. 로맹 가리라는 이름조차 생소한데 새들은 왜 또 죽는단 말인가? 표지만으로도 생각거리가 많아지는 책이다.       


1914년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인으로 살다가 1980년 파리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로맹 가리. 빌뉴스, 유태인, 파리라는 단초로 내 인식 공간 안에 그의 65년 인생 얼개를 그려본다. 2차 대전에 비행중대 대위로 참전, 전쟁 중에 쓴 첫 소설 <유럽의 교육>으로 작가적 명성을 얻었다. 20년간 외교관으로 일하며 LA 총영사로 미국에서 10년 넘게 살았고, 스물네 살 연하의 여배우 진 세버그와 재혼과 이혼을 거쳐 67세에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빌뉴스의 묵직한 공기, 화창하고 경쾌한 LA의 하늘, 예술 향취 물씬 풍기는 파리까지 그의 노정을 잠시 따라 가본다. 그와 나는 동시대를 살지 않았던가? 유럽에서 68혁명이 일어난 해에 태어난 나와 광주민주항쟁이 발발한 1980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12년쯤 한 지구 위에 있었으니 한 번쯤은 같은 숨을 들이켜지 않았을까?        

쉽게 읽히지 않는 로맹 가리의 작품을 한 숨 한 숨 들이켜 보니, 인간과 삶의 내밀한 모순을 뚫어보고 비틀어서 쓴웃음을 짓게 하는 그의 문체가 조금씩 형체를 드러낸다. 16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속에서 인상적으로 다가온 인물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보인다.        



첫째고집스럽게 특정 대상에 집착한다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서 ‘나’는 '물질적인 부에 완전히 경도된 탐욕스러운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태평양의 어느 섬에 은둔하기로 결심한다. 이익을 추구하는 경쟁 속에서 예술가적인 셈세한 성품을 지닌 '나'같은 사람들이 정신적 평화를 누리기가 어려운 분위기를 탈피하고 싶어 한다. 즉, ‘나’는 욕심이 없는 순수한 세상을 목말라한다. 

    <가짜>의 주인공인 ‘S...’는 미술 작품의 진위에 관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정체성이 분명한 예술작품은 불안정한 영혼 속에서 절대적인 확실성만이 일깨울 수 있는 그런 경건함을 그에게 불러일으켰다'(p.118). 'S...'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식품회사 대표 바레타가 최근 경매에서 30만 달러를 지불하고 구입한 ‘반 고흐의 알려지지 않은 걸작’이 모조품이라는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걸작을 손에 넣기 위해 온갖 애를 쓰는 것은 콤플렉스 덩어리인 자신의 출신을 잊기 위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결국, 그는 바레타의 회유 요구에 응하지 않고 감정사 단체의 '가짜' 소견 보고서를 언론에 게재해서 '반 고흐의 알려지지 않은 걸작'의 모조품 논란을 종식시킨다. 

    한편, <본능의 기쁨>에서 서커스단 연예인인 85cm 난쟁이 이그나츠 말러는 3미터 가까운 거인 세바스티앙을 소유물로 여기며 폐렴에 걸려 사망하거나 서커스 단원인 소녀와 사랑에 빠져 도망칠까 봐 노심초사하며 닦달을 한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너한테 돈이 들었단 말야. 유지비 외에 보험료만으로도 파산할 지경인데...” 또한 세바스티앙의 전임자 거인이 자신의 난쟁이 아내와 함께 도망친 것을 거듭 얘기하며, 그들이 어떻게 육체적인 관계 맺을 수 있었는지 집요한 궁금증을 드러낸다. 

    이렇듯 그 대상이 물욕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이건 '진짜 예술작품'이건 혹은 '본능의 기쁨'이건 인간이 각자 집착하는 대상에 탐닉하는 모습이 소설 전반부에 사뭇 진지하게 묘사된다. 풍자의 전개를 위한 전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둘째자기 신념을 벗어나는 것에 진저리를 친다.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서 ‘나’는 치사한 계산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소박하고 다감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것을 꿈꾸며 타히티 섬으로 가지만, '모든 것에 가격과 급료가 매겨져 있었고, ‘생활비를 번다’는 말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자주 등장'(p.262)해서 견디지 못한다. 끝내, 타히티를 떠나 작은 섬 티라토라에서 '천박한 자본주의적 사고에 전혀 물들지 않은 주민들 수백 명'(p.263)을 만난다. 특히, 오십 대 여인 타라통가와 친구가 되어 ‘그 섬까지 오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 천박한 물질주의와 비열한 상업주의에 대한 공포, 인간이 내세를 갖는데 필요한 무욕과 순수 같은 자질들을 다시 발견해야 할 절박한 필요를 느끼고 있다고'(p.264) 그녀에게 털어놓는다. 타라통가는 '자기 필생의 목표 역시 돈이 자기 동족들의 영혼을 더럽히는 것을 막는 것뿐’이라며 둘은 친구가 된다.

    <가짜>에서 ‘S...'는 ‘반 고흐’의 모조품‘에 대해 너무 가혹하게 대하지 말라는 아내 알피에라에게 짜증스럽게 말한다. “원칙의 문제라오, 여보. 위조된 작품에 대해 수백만 달러를 동원해 묵인의 공모를 얻어내려 하고 있소. 만약 우리가 거기에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진품과 가짜를 가려내는 일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될 테고, 그러면 최고의 수집품도 의미가 없어질 테니......”(p.126)

     <본능의 기쁨>에서 난쟁이 말러는 마치 본인만이 정상적인 인간인 것처럼 독설을 내뱉는다. “사람들이라면 구역질이 나요. 선생님, 정말 정나미가 떨어진다니까요. 그들은 속속들이 흉악해요. 흉악하다는 말이 딱 맞아요. 내 솔직한 의견을 말하자면, 인간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거예요. 인간이란 걸 말이죠, 선생님, 하하!...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기형적인 존재들일뿐이에요.” (p.146)   



셋째자신이 집착하던 대상에 자기가 걸려 넘어진다.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서 ‘나’는 어느 날 타라통가가 직접 구운 호두과자를 선물로 받는다. 그 과자를 싼 천은 놀랍게도 폴 고갱의 그림... 1억 프랑은 나갈 것 같은 폴 고갱의 그림들을 챙겨 들고 친구 타라통가에게는 70만 프랑을 선심 쓰고 프랑스행 배를 타기 위해 타히티로 간다. 그곳 호텔 주인은 타라통가를 잘 알고 있었다. “대단한 계집이죠... 그 여자가 당신에게도 틀림없이 그림을 보여줬을 텐데요? 그 여잔 놀라운 솜씨로 고갱의 그림을 모사한답니다...” (p.271)

    <가짜>에서 'S...'는 스물두 살이나 어리고 아름다운 아내 알피에라와 사랑에 푹 빠져 있다. 반 고흐 작품의 진위 논쟁이 마침표를 찍은 뒤 한 달 후 어느 날, 사진 한 장을 우편으로 받는다. 이목구비 중에서 유난히 매부리코가 거슬리는 어린 소녀의 얼굴 사진이 연거푸 배달되고 바레타의 전화를 받는다. “사진을 받으셨겠죠, 친애하는 선생?...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 그녀의 코는 열여섯 살 때 밀라노의 어떤 외과의사가 완전히 새로 만든 거요. 당신은 내 반 고흐 그림이 가짜라고 했소만, 당신 수집품 중의 걸작 역시 가짜요. 그 증거가 지금 당신 눈앞에 있지 않소.”(p. 131~132) 

    <본능의 기쁨>에서 세바스티앙을 사랑하는 소녀가 난쟁이 말러에게 직격탄을 던진다. “사태를 직시하셔야 할 때가 된 것 같군요, 말러 씨. 세바스티앙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예요.” 정곡을 찔리자 말러는 흥분하며 소리친다. “인간이라니! 들으셨지요, 선생님? 그렇다면, 나는 인간입니까? 선생님....”(p.153). 거인을 기형적인 물건처럼 취급하며 함부로 대하던 말러는 자신 또한 그토록 혐오하는 기형적인 인간임을 스스로 실토하고 만다.  

“이건 부당해, 이건 끔찍하다구!... 이럴 땐 정말 내가 인간이라는 게 부끄럽다니까.... ”(p.155)      


로맹 가리는 주관적인 고귀함에 집착하고 탐닉하며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비난하고 선을 긋는 인간의 모습을 희화한다. 그러나 결국, 모순되고 진저리 나는 현실이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이며 나 또한 내가 혐오하는 그런 인간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아차’하고 발견하게 한다. ‘아차’하는 순간에 심장이 쫄깃해지는 기분은 로맹 가리 읽기의 정수가 아닌가 싶다. 푸훗, 이제 그를 처음 만나 놓고 무슨 이리 아는 척을. 

천천히... 한숨 더 깊이 그를 호흡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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