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시집을 잘 가야 해
남이 만든 행복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
"여자는 시집을 잘 가야 해. K 알지. 걔 아직도 시집 못 갔데. 공부 잘해봤자 뭐 하니. 결혼도 못하고 요즘 계속 선본다더라."
"요즘 결혼 안 하는 여자들 많아. 그리고 자기 능력 있고 잘났으면 안 하고 사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무슨 소리하는 거야 얘가. 다 적당한 때가 있는 거야. 좋은 남자 만나서 좋은 환경에서 아이 낳고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 데."
"네 말도 맞는 데, K는 뭐 워낙 똑순이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애라 내가 보기엔 결혼 안 해도 잘 살 것 같아."
"아니, 걔도 지금 결혼하고 싶은 데 결혼시기 놓치고 자기 성에 차는 남자 없어서 난리 일 걸. 주변만 봐도 시집 잘 간 얘들 봐라 팔자 핀 거. 그니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가지. 뭔 공부를 그렇게 오래 해 가지고. 다 소용없어 시댁 잘 사는 게 최고야."
친구 미진이(가명)와의 티타임에서 화두는 노처녀가 된 K였다. 미진이는 항상 본인이 잘난 남편을 만나 여유롭게 사는 것을 큰 훈장으로 여기는 타입이었다. 그런 그녀가 가끔 불편하기도 했지만 항상 좋은 옷에 근사한 차를 타고 다니는 미진이의 일상이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그녀는 결혼 전부터 자기 수중에 있는 돈은 모두 피부과, 백화점에만 투자했다. 노골적으로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 정도는 해 오는 남자를 만날 거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놓고 속물인 그녀를 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자기 속내를 거침없이 내놓는 미진이가 솔직해서 좋았다. 그녀는 결국 자기가 원하는 대로 부자남자를 만나 한강이 보이는 근사한 집에서 살게 됐다. 그녀를 욕하던 친구들도 나중에는 다들 미진이를 부러워했다. 진작에 그녀처럼 경제력 있는 남자를 만났어야 한다고 말이다.
미진이는 노처녀가 된 K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며 은근 K를 무시했다. 같은 고등학교 친구인 K는 친구들 사이에서 제일 공부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뭐든 잘하는 똑순이로 통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장 좋은 대학에 들어가 공부도 오래 했고, 현재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 이것저것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서 그랬을까 K는 흔히 말하는 노처녀가 됐다. 미진이는 우리가 결혼해서 일궈 놓은 가정을 높이 평가했지만 K가 걸어온 길은 그리 가치 있게 평가하고 있지 않았다.
과연 그럴까. 어떤 삶이 더 낫다고 절대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가치관은 너무나 제각각이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부자남편을 만난 미진이의 윤택한 삶을 선호할 수도 있고, 혹자는 능력 있는 K가 걸어온 길을 가치 있다고 여길 것이다.
어릴 때부터 '시집 잘 가야 된다'는 말을 종종 들어온 나도 미진이처럼 생각해 온 시절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남자를 만나 윤택하게 사는 것도 참 좋겠다 싶었다. 가끔 큰돈이 필요하거나 부모님께 용돈을 드릴 때면 내가 부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실제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지금 어떤 삶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K의 삶이다. 왜 냐고? 내가 결혼 10년 차에 깨달은 것은 결혼이 여자의 인생을 언제까지나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이 만든 행복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 부자 남자를 만나 만든 가정에서 빛나는 경제력은 남편이 만든 것이다. 물론 본인까지 능력 있는 여자라면 상관없다. 남편의 부에 기댄다면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꼭 '돈'이 아니어도 인생의 행복을 자신이 아닌 남편 혹은 타인에게 기대어 산다면 그것은 언제든 타인에 의해서 무너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상한 남편이 주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여자가 있다고 치자. 그 남편이 365일 자상할까. 때로는 갈등이 생기고, 철천지 원수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전부였던 게 없어지는 거다. 부자남편의 '경제력'에만 기대 살면 어떨까. 그 부자남편과 이혼하게 되거나 그 남편의 사업이나 일이 불안정해지면 다 부질없어지는 거다. 본인이 만들어 놓은 능력이나 행복에 중점을 두지 않으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세상에 모든 것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지만 자신의 인생을 추를 스스로에게 가까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 부잣집에 시집을 간 내 친구 미진이는 현재 이혼을 했다. 남편이 띠동갑도 넘는 어린 여자와 바람이 나서 새살림을 차린 것이다. 상간소송부터 이혼소송까지 진흑탕 싸움을 끝낸 미진이는 더 이상 친구들 사이에서 연락이 되지 않는다. 어린아이와 돌싱으로 적응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주변에 이런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나오는 불륜사건이 알고 보면 우리 주변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몇 년을 친하게 지내던 동네 엄마가 갑자기 이사를 가버린 후 알게 된 소식도 그 집 '남편의 외도'였다. 친하게 지내던 남편 직장 동료 부부와의 모임이 점점 줄게 되었을 때도, 숨은 사연은 '외도'였다. 생각보다 부부의 세계는 비루할 때가 있다. 믿었던 배우자가 배신할 수도 있고, 둘만의 문제로 남이 될 수 있다.
결혼이 인생의 종착지가 결코 아니다. '여자가 시집을 잘 가야 된다'는 말에 의미가 부자남편을 만나라는 말이 아니라 함께 인생을 꾸려나갈 '좋은 동반자'를 만나야 한다가 되면 좋지 않을까. 결혼이란 두 사람이 동등하게 나란히 서서 함께 성장했을 때 그 결과도 좋다고 본다. 결혼해서 하나가 된다고들 하는 데, 결혼해서도 그냥 둘인 거다. 두 사람이 함께 '동지애'를 느끼며 치열하게 살아나가는 것이 내가 깨달은 이상적인 결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