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 나는 도망치듯 결혼했다. 취집(취업대신 시집이라는 의미의 신조어)의 대가가 이렇게나 클지 모른 채, 아름다운 미래만 그렸다. 결혼이 '도피처'가 돼버린 선택은 생각보다 가혹하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회피하면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해결되지 않은 채 내 곁을 계속 맴돌다가, 생각지 못한 순간 불어나버려 몇 배의 짐을 지게 한다.
불안정한 미래가 두려웠다. 30년 가까이 살아온 본가에서도 지독히도 벗어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새 가정을 꾸리고 안정적인 미래를 꿈꿨다. 마침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고, 혼기가 꽉 찬 그는 내게 결혼하자고 격렬하게 애원하던 중이었다. 어디든 기대고 싶은 마음이 컸던 지라, 나는 내게 내민 그 손을 '덥석' 잡았다. 결혼을 결심하고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순식간에 유부녀가 됐다.
나는 유부녀가 되고 거의 1년도 되지 않아 백수가 되었다. 물론 남편과 합의된 결정이었다. 나는 당시 스타트업 IT회사에 다니고 있었는 데, 회사 존폐위기가 거론될 정로로 재정이 안 좋아졌다. 정말 필수 인력만 남기고 대부분 직원들이 이직을 준비해야 했고, 나는 그 필수인력에 포함되지 않았다. 떠밀리듯 회사에서 나와야 했고, 새 직장에 터를 잡기보단 좀 더 쉬워 보이던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했다.
나는 결혼 전부터 전업주부로 지내기로 남편과 마음을 맞췄었다. 빨리 아이를 가지는 것이 공동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스스로 늦은 결혼이라 생각했던 남편은 빨리 아이 낳기를 원했고, 나도 동의했다. 나는 워낙에 몸이 약해 회사생활 중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를 잘 못 이겨냈고, 심한 생리불순이나 부정출혈 등에 시달렸다.
"몸도 약한 데 이직하지 말고 집에서 아이준비나 하자. 어차피 바로 아이 가질 생각이었고, 아이 생기면 일도 그만둘 텐데 그냥 집에 있어. 너 자꾸 하혈하고 이직준비로 힘들어하는 거 못 보겠어. 또 유산이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남편은 내가 집에 있기를 원했고, 한창 이직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던 나는 못 이기는 척 동의했다. 사실 몇 번의 유산을 겪은 후 임신에 대한 불안감도 한몫했다. 그렇게 나는 퇴사 후 편히 병원에 다니면서 아이 준비를 했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살아온 남편과 나는 남자는 나가서 돈을 벌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과 육아를 한다는 생각이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촌스러운 생각인데 말이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시어머니께 처음 들었던 이야기가 '태몽'이었다. 시댁에서는 소꿈을 꿨기에 분명히 아들일 것이라고 들뜬 분위기였지만 역시나 허니문 베이비는 실패했다. 그 뒤도로 비슷한 상황은 반복됐다.
몇 번의 임신시도 끝에 나는 시댁에서 그렇게 원하던 '아들 출산'에 성공했다. 나는 그때 시어머니에게 "고맙다"라는 말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다. 원하던 출산과 전업주부생활이 시작됐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출산 때 의료사고를 당해 힘든 시간도 겪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고, 내가 꿈꾸던 장밋빛 미래는 없었다. 몸은 자꾸 약해져 갔지만 시댁에서는 '둘째'를 원했다. 이번에도 아들이 좋다고 하셨다. 이때부터 내 마음은 시댁에서 조금씩 멀어졌던 것 같다.
결국 둘째 임신에도 성공했다. 시댁은 축제 분위기였다. 반대로 친정은 초상집이 따로 없었다.
"너 어쩌려고 그래. 아이 하나 낳고도 그렇게 고생하고 있잖니. 몸도 안 좋은 애가. 너 그 몸으로 애 둘을 키울 수나 있겠어. 엄마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잖아."
출산 후 건강이 악화된 상황이어서 친정엄마는 내 임신 소식에 화를 내셨다. 이해가 됐다. 나도 사실 두려웠으니까. 그래도 점점 내 뱃속에서 커카는 아이의 존재감을 느낄 때마다 불안감은 소멸되고 행복감은 커졌다. 불행하게도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고 나는 둘째를 잃었다. 선천적으로 심장기형을 타고난 아이는 더 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중기유산이었기 때문에 그 여파는 꽤 컸다. 몸에 무리가 크게 갔고, 그 뒤로 크고 작은 수술도 몇 차례 받았다.
몸은 약해졌지만 첫째 아이 육아는 해야 했고 살림도 해야 했다. 모두가 걱정해 줬지만 내 몫은 내가 해야 했다. 전업주부에게는 퇴근이 없기 때문이다. 남편은 너무나 바쁜 직장에 다녔고, 나를 돕기에는 여력이 없었다.
친정엄마라도 도와주길 바랐지만 엄마도 본인 인생이 너무나 고달팠다. 30년 넘게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고, 할머니는 치매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의 할머니는 엄마가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지독한 시집살이를 시키셨다. 우리 집은 고부간의 갈등으로 항상 숨이 막혔다. 할머니는 항상 엄마를 못마땅해하셨고, 밖에서 일하는 아빠의 고생으로 먹고사는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고 상기시켰다. 우습게도 엄마와 아빠는 함께 자영업을 하셨다. 엄마는 가게일과 집안일, 할머니 수발까지 드느라 아빠보다 항상 더 분주했다. 엄마의 고생에도 아빠는 엄마보다 홀로 자신의 키워온 할머니를 가여워했다. 아빠는 항상 엄마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기보다는 할머니를 변호하기 바빴다.
지독하게 가부장적인 가족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놈의 아들타령이 지겨웠다. 아들을 최고로 여기시는 할머니는 나를 예뻐해 준 적이 거의 없었다. 이유는 '여자'여서. 나는 학창 시절 꽤 공부를 잘했지만 할머니는 항상 쓸모없다고 하셨다. 여자는 결혼 잘하는 것이 '최고'라고 하셨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항상 화내시고 핀잔주던 모습으로만 기억된다. 고부갈등을 해결하지 않고 버티고만 있는 엄마도 미련해 보였고, 방관하는 아빠도 미웠다. 나는 30년 가까이 살아온 가족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내가 취집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가부장적인 가족에서 벗어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 하지만 난 실패했다. '아들'타령하는 집에서 벗어나 또 '아들'타령하는 가족을 만났다. 편하게 살고 싶었지만 더 고단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뼛속까지 '촌스럽고 가부장적인' 사고가 가득했던 것 같다. 요즘 같은 백세시대에 너무도 쉽게 일을 포기했고, 내 인생을 남편에게 기댔다. 그 결과 아들출산이 최고 목표인 삶을 살다 지고지순한 '현모양처'의 길을 걷게 됐다. 모두가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주변환경을 탓하기만 한 채 정작 나는 변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않은 대가는 너무도 크다. 나는 나로서 살지 않았고, 편한 선택만 해왔다. 결혼이라는 도피처가 내 인생의 구원이라고 오해했다. 당면해 온 과제들을 해결하지 않은 채 살다 보니 오히려 내 맘속에 물음표만 가득해져 버렸다.
다행히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 결혼이 결코 인생의 도피처가 되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는다. 기댄다고 내 인생을 누가 결코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취집의 대가(代價)는 이렇게나 달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