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 탈출을 선언 한 후로, 막막했다. 어떤 일부터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생각만 가득할 뿐 행동은 없는 채로 일상을 뭉갰다.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시작도 안 한 채 김이 새버린 느낌이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데, 사실 시작이 제일 어렵다. 시작만 하면 무슨 일이든 생기기 마련이지 않나.
일단 노트북을 켰다. 나는 답답하면 노트북을 켠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그냥 내 생각을 두서없이 써내려만 가도 뭔가 해소됨을 느낀다. 한 참을 뒤엉킨 내 생각들을 토해냈다. 무슨 말을 쓰는지도 모른 채 그냥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쓰는 것이다. 난 이 방법을 정말 추천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졸리다. 기운이 없다. 나는 오늘 뭐 하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이렇게 사는 것이 잘하는 것일까. 돈을 벌고 싶다. 이제 와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아들이 보고 싶다. 오늘 날씨는 왜 이러지. 창 밖 풍경이 너무 좋다. 산에 가고 싶다. 가을이 되면 산에 많이 가야지. 글을 잘 쓰고 싶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뭐 먹지. 엄마가 보고 싶다. 오늘 운동을 해야 한다. 건강해야지 뭐든 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을 잘하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뭘까. 영화. 드라마. 이야기. 책. 도서관....
이렇게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막 토해내다 보면 생각보다 머릿속이 정리가 된다. 두서없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내가 무엇을 갈구하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핏 알 수 있다.
한참을 쏟아내다, 일단 나를 '나'를 설명해 보기로 했다. 나를 어떤 식으로든 써먹고 싶었다.
'자기소개를 해보시오'
38세 전업주부. 7살 아이의 엄마. 경력단절 8년 차...
더 이상 나를 설명할 말이 없었다. 전업주부를 그만두겠다던 자신감은 어디로 가고, 점점 쭈구리가 되어간다.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도 막막했다. 경력단절 8년 차라 사실상 신입사원이나 마찬가지다. '나 뭐 하고 살았던 것일까' 자괴감이 들었다. 출산과 육아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지만, 취업시장에서는 한없이 작아졌다.
나는 '나'를 어떻게 써먹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취업시장에 뛰어든다는 접근을 틀었다. 사실상 일반 회사에 취업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냥 나는 내 마음을 나열해 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등 일단 나를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이상하게 신이 났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나는 작가가 되고싶다.
-나는 글 쓰는 일로 돈을 벌고 싶다.
....
사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건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걸 꺼내놓기가 부끄러웠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크다. 나는 오랫동안 작가를 꿈꿨었다. 어린 시절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고, 대학전공도 '극작'을 선택했다. 막연히 '나는 작가가 될 거야.'라고 꿈만 꿨지, 치열하게 쓰지 못했다. 그냥 꿈만 꿨다.
대학졸업 후 동기들은 드라마 막내작가로 들어가거나, 연극판에 뛰어들거나, 영화 쪽으로 자기 길을 찾았다. 나는 계속 글쓰기에 도전하기보다는 일반 회사에 취업했다. 사실 내 딴에는 냉정한 현실파악이었다. 내 글재주로는대단한 작가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작가로서 아무것도 안될 바에는 적당한 회사에 취업해 평범하게 사는 것을 선택했다. 현실파악 혹은 비겁한 도피다.
평범함을 택한 덕에 동기 중 몇 안 되는 기혼자에 애도 있다. 특이하게 내 동기들은 거의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들 기준엔 내가 특이할 수도 있겠지.
여전히 글 쓰는 친구들은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던 드라마가 사실 친구의 첫 작품이었 던 사실에 놀라고, 내가 듣던 라디오에 동기 녀석이 드디어 메인작가가 되었다. 다양한 곳에서 그들의 성과가 빛나면 축하도 해주지만 질투의 감정도 크게 느껴진다.
어느 날 대학시절 친하게 지내던 동기가 드라마작가로 입봉 했단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나 놀라웠다.
"말도 안 돼. 진짜 글 쓰는 재주도 아이디어도 없던 앤 데. 게다가 내가 보던 TVN드라마야. 미쳤어"
흥분해서 남편에게 소리치자 남편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동안 많이 노력했겠지. 뭘 그래. 어지간히 질투 나나 보내."
내 말에 딴지를 거는 게 서운했지만 남편말이 맞았다. 그는 얼마나 오랜 시간 자신을 갈고닦았을까. 그 치열한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을 만들었을 거다. 난 그의 성공의 시작에 축하는커녕 비하 섞인 치졸한 질투만 내뱉고 말았다. 부끄러움이 한없이 몰려왔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항상 편한 길, 가성비 괜찮은 선택만 해왔다.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언제 성과를 낼지도 모르는 막연한 꿈이 불안했다. 재주도 시원찮은 데, 묵직하게 엉덩이 붙이고 글 쓰는 치열함도 없었다. 그래서 적당히 직장 생활하며 돈 벌고 여행도 다니고 또래 친구들이 하는 건 다하고 다녔다. 적당한 나이에 결혼도 하고 적당한 나이에 애도 낳았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았는 데 나는 여전히 '욕구불만'이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가 여전히 내게 존재했던 것 같다. 나는 일단 대단한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특별한 사람만 글을 쓸 수 있다는 내 안의 편견도 버리기로 했다. 그저 써보기로 했다. 그게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