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가 어렵기만 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눈치가 없고 말길을 못알아듣는 나의 기질은 사는동안 늘 나를 긴장하게 했다. 지금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지만 그 과정은 실로 힘겨웠다. 11살이 되면서 울진에서 서울로 전학을 온 나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람 사이의 미묘한 흐름을 잘 읽어내질 못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유아기적 미숙함으로 엄청 좋다가도 어느순간 쌩해진 분위기로 자꾸만 어긋나기 일쑤였다. 특히나 돌려 말하는 맥락을 파악하지 못해서 친구들을 곤란하게 한 적도 있다.
중학생때 부모님의 불화는 최고조에 달했다. 밖에서는 아무 문제없이 웃고 서로를 챙기시는 부모님은, 집으로 돌아가는 차를 타시자마자 싸늘한 살기를 뿜어대며 서로를 대하셨다. 학교진학문제로 아빠보다 먼저 서울로 올라왔을 땐 한달에 한두번, 그리고 방학때만 잘 넘기면 됐다. 그러다 아빠가 서울로 발령받아 같이 살게 된 후에는 부모님의 기분에 따라 어떤 분위기 될지 알수 없는 집안분위기가 너무나 버거웠다. 나는 점점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어떻게든 늦추기 시작했다.
학교를 마치면 베프였던 수정이네 집에 매일 놀러갔는데, 수정이 엄마는 늘 친절하셨고 맛있는 것도 많이 만들어주셨다. 미국에서 막 전학와 한국이 낯설었던 수정이와 나는 같은반 짝꿍이었다. 우린 급속도로 친해졌고 매일 수정이네서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고, 수정이네 가족과 저녁도 먹으며 지칠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눈치도 없이 매일같이 놀러오는 나를 불편해 하시리란 걸 몰랐다. 그날도 평소처럼 놀고 있었다. 수정이엄마가 수정이에게 영어로 화를 내시며 뭐라 말씀하시자 난감한 표정으로 짜증을 내며 영어로 대답했는데, 순간 나때문이구나 라고 직감했다. 그날 이후, 나는 더이상 수정이네집에 가지 않았다.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학교를 마치면 만화가게에 파묻혀있기 시작했다. 당시 학교근처 만화가게는 시간당 요금을 받았다. 용돈을 쪼개 아껴서 만화가게를 갔지만 매일 가기엔 부족했다. 달리 할일도 없고, 만화가게나 오락실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던 중 우리학교 일진 아이들과 마주치는 일이 빈번해졌다. 어느새 나는 그 친구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없는 아지트도 있었고, 당시 모범생이던 나를 그 친구들은 신기해하며 받아주었다. 나는 그렇게 우리학교 일진이 되었다.
하지만 모범생과 일진 사이에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 되어갔다. 선생님들은 학교로 불려오신 엄마 앞에선 내 미래를 걱정하고 배려하셨지만, 나는 매일 출석부로 맞거나 교무실로 불려다니며 구제불능으로 취급받았다. 일진 친구들은 범생이를 물들였다는 억울한 누명과 결정적인 순간에 범생이를 앞장세울 수 있는 혜택 사이에서 나를 끼워주기도, 배제하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여기저기서 치이고 까이며 눈치만 보는 찌질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학탈과 가출 정도에서 적정선을 유지했던 일상은 사생대회 날 타학교와의 패싸움으로 선을 넘고야 말았다. 친구들은 퇴학 내지는 정학이었는데, 나는 근신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사건으로 일진 친구들은 더이상 나를 끼워주지 않았다. 그리고 자꾸 어긋나는 학교생활 덕분에 부모님은 서로를 향한 칼을 거두고 나를 구제하기 시작하셨다. 엄마의 노력으로 나는 친구가 한명도 없는 학교로 배정받았고 평범해진 내 일상에 안도하신 부모님은 다시 서로에게 차갑게 등을 돌리셨다.
나의 눈치없음은 20대에 절정에 달했다. 누군가를 챙겨주는 세심함을 낯설어했고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이해하기 힘든 메시지에는 당황하기 일쑤였다. 간혹 마음이 맞아 친해진 친구들 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불편함으로 편이 갈리면 우왕좌왕하다 낙동강 오리알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여자친구들 무리에 잘 끼지 못했다. 그리고 당시는 가부장적 분위기가 당연시되던 시절이라 남사친이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20대는 사귀는 남친과 그의 친구들이 다였다.
소주 한잔에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이 약했던 나는, 남친과 그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주량을 늘려갔다. 우리는 만나면 오락실이나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당구장이나 만화책방에서 짜장면을 시켜먹었다. 늘 하루의 마무리는 술자리였고 그 자리에선 어김없이 각자의 연애이야기가 단골메뉴로 나왔다. 친구들의 여친과도 곧잘 만났던 나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날을 세우며 열변을 토하곤 했다. 그들의 고충을 겉과 속이 다름으로 받아들인 지극히 유아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면 안된다 진심이 중요하지 않냐 뭐 그런 개똥철학같은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어쩌다 함께하는 여자친구들과의 만남에선 그들의 속물스러움을 경멸하기도 했다. 같이 술을 마시기라도 하면 남자앞에서 돌변하는 가식적인 뇬아 하면서 진심이 없음을 홀로 개탄하곤 했다. 알수 없는 밀당을 극혐했고 왜 솔직히 자기 감정대로 따라가면 안되냐고 하면서 친구들을 곤란하게 하기도 했다. 남녀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나는 쫓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술만 마셨다 하면 “진심”이 있어야 한다며 친구들을 붙잡고 하소연하기 일쑤였다.
나는 여전히 겉과 속이 다름에 적응하지 못한다. 돌려 말하면 잘 모르고, “괜찮아요”라는 말을 진짜 괜찮다고 듣고 흘려버려서 서운하다는 뒷말을 듣는다. 다른 사람들도 보이지 않으면 잘 눈치채지 못하던데, 나에게만 알아서 눈치껏 하라는 말처럼 들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때도 많다. 그런데 나를 제외하고 다른 이들은 알아서 상대를 잘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걸 느끼면 내가 눈치가 없음을 느끼곤 하다. 여전히 유아적 사고방식으로 인간관계를 하는 나는 지금도 술을 마시면 겉과 속이 다름은 진심이 없음으로 받아들이고 슬퍼할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