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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욱근 Mar 23. 2020

딱 한 번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창문 너머로 들어온 햇살이 당신께 닿습니다. 햇볕을 이불 삼아 아이처럼 곤히 잠든 당신을 보고 있으니 제 마음까지 아늑합니다. 그런데 문득 우리의 역할이 조금 뒤바뀐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누워 있고, 당신이 나를 보고 있어야 하는데, 당신이 내 다리에 누워있고 내가 당신을 보고 있으니, 이게 참 이게 참 가을 같습니다. 햇살은 따뜻한데, 풍요가 떠난 논밭에는 적막과 허허로움만 남아 있네요. 당신이 잠들어 있습니다. 향기 잃은 꽃밭에 날개 접은 나비처럼.


책가방을 던져 놓고 당신의 다리 위에 누울 때면 땀에 젖은 이마를 앞치마로 닦아주셨습니다. 그러곤 제 머리를 구슬처럼 어루만지며 주문을 외셨습니다. “빨리 커라, 쑥쑥 커라. 빨리 커라, 쑥쑥 커라.” 잠을 많이 자야 빨리 어른이 된다는 말을 굳게 믿었던 저는 눈을 감고 단잠에 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까. 가을이 오면 여름은 가야 하고, 내가 얻으면 누군가는 잃는 것처럼, 내가 크면 당신은 어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언젠가부터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너무나 자주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습니다. 리모컨을 모리콘이라 부르고, 손에 휴대폰을 쥐고도 온 방구석을 뒤적이는 당신이었던지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은 내게 집이 기억나질 않는다 합니다. 지금 바쁘다고, 장난칠 시간 없다고 끊으려는 데, 당신의 목소리가 나를 붙듭니다. “우리 집이 삼익 아파트였나, 은아 아파트였나….” 흐려지는 말끝은, 커다란 추를 달아 놓은 듯,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습니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고, 우리에게 평범하지 않은 일이 불어 닥쳤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머니 속 사탕처럼, 하나 둘 까먹어버리는 당신을 붙들고, 화도 내 보고, 소리도 질러 보았지만, 어찌 그리 쉬이 사라지는지. 문득 당신의 기억이, 아니 당신이라는 존재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았습니다. 겁이 난 제가 당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연신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데, 당신이 제 팔을 붙들고 이럽니다. “아가, 울지 마라. 시계 말고 레고 사줄게. 레고.” 유년시절, 레고가 갖고 싶었던 제가, 트리 밑에 놓인 시계를 보며 하루 내 울었던 기억이 뇌리를 스칩니다. 당신의 기억은, 몇 년도 이십니까.


어머니, 이렇게 쓰다듬으면 당신도 다시 크시나요. “빨리 커라, 쑥쑥 커라. 빨리 커라. 쑥쑥 커라.” 이렇게 하면 당신의 기억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나요. 딱 한번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저를 무릎에 누이고 주문을 외는 당신께, 말하고 싶습니다. 안 커도 좋으니 지금 이대로만 있자고, 안 커도 좋으니 지금 이대로만 있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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