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말했다. 사람 사이 중요한 건 뜨거운 것보다 지치지 않는 것이라고. 식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 관계는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았다. 봄날의 오후 같은, 그런, 춥지는 않지만 따뜻하지도 않았던 날씨 같았다.
내가 갖지 못한 모습을 가진 사람 같아서 그게 멋있어 보였다. 그저 촌스럽기 짝이 없는 네 모습에도 부지런하고 추진력 끝내주게 좋은 네가, 우유부단한 나와는 달리 그랬던 너의 그 모습에 반했다.
"하지만 예전에 열렬히 좋았던 것이 시시해지기도 하고 취향도 변하듯,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인생의 주요 시기마다 목표와 우선순위가 바뀌기 때문에 같이 있고 싶은 사람도 계속 바뀌는 것이다. 내가 사회학에 푹 빠졌을 때는 사회참여를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을 사랑했고, 영화와 음악에 관심을 많이 가졌을 때는 예술가의 면모를 보이는 사람에게 반했다.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때는 개그 코드가 맞는 사람을 찾아다녔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고 고민이 깊을 때는 배려심 많은 이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럴 때 나는 제일 나다울 수 있었다. 나의 일부가 된 후 작별하고, 이를 통해 성장한다. 졸업식에서 우는 학생은 영원히 학교에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작별의 의식일 뿐이다. 나이를 먹고 얼굴이 변하고 몸이 변화하듯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변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무리 친밀했던 사이라도 그 만남이 나를 더는 상장하게 하거나 자극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면, 나를 더는 괴롭히지 않고 떠나보내게 됐다."
-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방법' 中
너는 늘 매사에 신중하다며 나의 장난삼아 묻는 물음에도 빈말 한마디 하는 법이 없었다. 너의 주변 어른께서는 사람을 볼 때 '건강, 미소, 인성' 을 보라고 했다며 나를 보면 건강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고 말했다. '미소는? 인성은?' 이라고 되묻는 내게 말을 돌리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자꾸 말을 돌리냐고 칭얼거렸다.
"내가 워낙 신중하잖아."
네가 그렇게 신중했다면 애초에 시작부터 하지 않았을 텐데. 멀리 한국을 떠나서 살아야 할 네 미래를 너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 않은가. 너는 바쁘다는 말만 하지 않는 바쁜 사람이었다. 네 코가 석자인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 정성스러운 편지 한 통 보다 밥 한 끼 대접하는 게 더 쉬운 사람이었다는 걸 나는 왜 이제서야 알았을까.
나는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글 쓰는 게 좋다고 말했다. 책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너는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이 그거잖아. 다 해줄게."
어느 날 친구의 부탁으로 너를 조금 번거롭게 한 날이 있었다. 나의 부탁에 응해줄 것 처럼 하던 너의 대답은
"나는 솔직히 안하고 싶어"
나는 좋게 애둘러서 말했다.
"아차싶었어.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속도 없지. 아차싶으라고 던진 말에 눈치없이 괜찮다며, 너의 친한 친구의 일이지 않냐며, 이해한다며, 지금 회사를 떠나 있어서 해줄수가 없다며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말하는 너.
네가 던진 몇차례의 수표.
아, 공수표였구나.
나를 이해한다던 너.
나를 이해해달라던 너.
단언컨대 너가 나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너의 시작은 공수표였고,
나는 그런 공수표에 환멸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