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9일
할머니는 계속 계속 아프다. 나이가 들어 감각이 무뎌져서 그런지 자꾸만 넘어져 뼈가 부러진다. 넘어지고 부서지고의 반복이다. 벌써 몇 번째 수술인지 모르겠다.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는 할머니를 보면 기억마저 잃어가는 것 같다. 오락가락 하는 할머니를 보면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다.
2020년 4월 18일
간병은 정말 귀찮은 일이다. 짜증나고 번거롭고 성가신 일이다. 할머니가 짜증나는 게 아닌데 자꾸 다른 이유들 때문에 할머니한테 짜증만 내고 있다. 간병을 하러 온 건지 할머니랑 싸우러 온 건지 모르겠다. 순간적으로 너무 화가나고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랬다. 뒤돌아서면 눈물나지만 얼굴보고 있으면 울화통이 터진다. 제발 할머니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위치는 가족과 같은 단지 아파트에 위치한 할머니 집이었다. 당시 내가 누릴 수 있는 호사 중 최고의 호사였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할머니는 마치 누군가를 보살피기 위해 태어난 여인 같았다. 네 명의 자식들이 성인이 된 후에는 친척 오빠와 나를 부양했고 현재는 할머니의 막냇동생을 부양하며 살아가고 있다. 할머니는 매우 강인한 여인이었다. 온갖 세월의 풍파를 다 겪은 강인한 여인. 제아무리 자식이 그녀를 원망하고 집안의 물건을 던지고 그녀에게 소리를 질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여인. 오히려 제 잘못이라고 말하는 미련한 여인. 자신에게 아픔을 주었던 사람에게도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 여인. 일방적인 사랑을 주는 여인.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여인. 책임감이라면 두말할 것 없는 여인.
함께 하는 동안 나는 그녀에게 좋은 손녀딸이 아니었다. 그녀가 차려준 따스한 밥상 앞에서 그간 못했던 반찬 투정이나 하는 아주 버릇없는 손녀딸이었다. 아침마다 피곤에 전 나를 깨워주는 따스한 손길에 짜증만 내는 아주 못된 손녀딸이었다. 아주 비겁하고 못된 손녀딸이었다. 아빠를 보고 자라며 '나는 저런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 싶었는데 나는 할머니와 함께 하는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 그녀를 술 취한 아빠가 나를 대한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버릇없이 대했고 나도 언젠가 아빠와같은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당시의 하루는 참 길고 정신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에 갔고 주말이면 하루 12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했다. 여타 고3이 보내는 시간들도 이와 같겠지만 누구보다 절실했고 간절한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 잘하지 못하면 정말 이 삶이 끝날 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가끔씩 술에 취한 아빠가 할머니 집으로 직접 찾아와 우리를 괴롭히긴 했지만 견딜만했다. 그전보다 나아진 생활임은 분명했으니까. 나는 고등학교에서의 생활이 좋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건 힘들었지만 좋아하는 공부를 실컷 할 수 있는 학교라는 공간이 좋았다. 당시 공부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쯤이었을까. 친구를 따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당시 최저임금이 4320원(2011년) 이었지만 나의 첫 시급은 2800원이었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스스로 돈을 벌고 이제 더 이상 부모님에게 용돈 따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았다. 그때 이후로 나는 일절 용돈을 받지 않기로 결심했다. 할머니 집에서 지내기 시작하면서 핸드폰 요금, 인터넷 요금, 한 달 용돈을 모두 나의 아르바이트비로 충당하기 시작했다. 금전적으로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순간 집으로부터 느끼는 압박감이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처럼 부모님께 금전적으로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선언은 나에 대한 모든 금전적 책임은 오롯이 내가 지겠다는 뜻과 같았다. 17살이 부담하기에 결코 쉬운 영역은 아니었다. 인터넷 통신비, 핸드폰 요금, 갖고 싶고 먹고 싶은 것들, 가끔씩 큰 도시로 놀러 다니는 일 등 이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기 시작한 후로부터 나의 삶은 무한정으로 자유로워졌다. 노동의 대가는 달콤했다.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과도 같이 여겨졌다.
열일곱 살, 그 해 아빠는 새엄마와 작은 포장마차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포장마차는 낮에 문을 여는 곳이 아니다. 그리고 일찍 문을 닫는 곳도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포장마차 운영을 결심하고 나에게 한 부탁이었다.
“야자 하지 말고 집에 와서 동생들 돌봐줘라.”
남들은 학원이다 과외다 하며 야자를 빼는데 나에게는 그 사유가 고작 동생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이라니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생계유지가 급한 나머지 나의 사정은 뒷전이었다. 나는 자식이었지만 그들은 부모였다. 아마도 생활고가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 컸던 나머지 내게 그렇게 말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일방적인 통보였다. 나의 의사는 늘 그렇듯 묻지 않았다.
내가 살던 곳은 비평준화 지역이었기 때문에 인문계 고등학교는 시험을 쳐서 입학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특이한 사항이 아니라면 중학교 성적에 맞춰서 갈 수 있는 고등학교가 정해지는 거였다. 당시 제천여자고등학교는 지역 내에서 성적으로 갈 수 있는 고등학교 중에서는 첫 번째였다. 나는 제천여고의 학생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바람대로 야자를 하지 못할 상황이라면 인문계 고등학교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한 친구들은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해서 전교 10등 안에 들곤 했다. 그들은 ‘선취업 후진학’이라는 슬로건 아래 고졸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상업고등학교에 가게 된다면 좋은 성적에 장학금도 꾸준히 받고 좋은 직장도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아마도 4월이었을 거다. 나는 아빠에게 상업 고등학교로의 전학을 부탁했다. 학교를 옮긴다면 나는 정말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당연히 거절당했다. 그냥 학교를 다니라는 말이었다. 미성년자였던 나는 부모님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막냇동생이 원주 기독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에게 췌장암이 발견됐다는 소식이었다. 팔자 좋게 야간 자율학습이나 하면서 공부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공부를 하겠다는 핑계로 동생들 돌보는 것을 등한시할 수가 없었다. 용꼬리가 되는 이 뱀의 머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췌장암 수술이 잘 끝났고 막냇동생도 건강해진 이후로 나는 3년의 계획을 담은 편지를 아빠의 자동차 차창 앞에 꽂아두었다. 그렇게 그 해 9월 말 고등학교를 자퇴하게 되었고 그다음 해 상업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나름 나의 편지와 계획이 뜻대로 흘러간 순간이었다.
고등학교를 다시 선택하고 학교를 다니는 동안 누릴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누렸다.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그 삼 년 동안 운이 잘 따라주었다. 나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중요 자격증 시험에도 합격했고, 상도 여럿 받았다. 해외여행도 장학생이라는 명분 하에 세 번이나 다녀왔다. 당시의 나는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밤 11시쯤 되어 도서관이 문을 닫을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갔다. 차라리 그 삶이 편했다. 나에게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삶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나의 선택을 백 번 이고 천 번이고 칭찬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과도 같았지만 생활비를 스스로 감당하는 일은 사실 꽤 힘든 일이었다. 자식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혹은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자식을 책임지는 게 부모의 온전한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자식이 힘든데 그들이 힘들도록 내버려 두는 것 또한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 안에는 그간 쌓여온 많은 일들이 섞여있다. 그렇기에 남들보다 조금 더 힘든 시간이라 간주하는 지도 모르겠다.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시간. 어쩌면 할머니가 곁에 있어줘서 가능했을 지도 모르는 시간.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늘 미안하고 늘 감사하다.
그 시간을 거치며 고등학교 졸업 이후 반드시 고향 곁을 떠날 것을 결심했다. 할머니에게 더 이상의 못난 손녀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계속 제천에 있는다면 아마도 나는 늘 못난 모습만 보여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빠의 못난 모습을 보게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가능한 아주 빨리 제천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