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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 Oct 29. 2020

더 먼 곳으로


2017년 12월 16일     


인천-서울 출퇴근하며 보낸 1년 프로젝트를 끝으로 내게 준 선물(사실 현실도피)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조차 귀찮고 지쳤을 즈음 도망치듯 올라탄 비행기, 늘 챙기던 카메라를 뒤로한 채 배낭 하나 메고 시작한 여행, 생각 외로 모든 게 순조로웠던 여정.     


2016년은 2017년을 위한 지독한 농사였을까? 올해는 모든 일이 잘 풀렸고 만족스럽지만 정신이 육체를 따라갈 수 없었던 날들. 꿈만 같았고 꿈이었던 6일간의 여정, 존재하지 않는 천국의 무언가를 나 홀로 맛보고 온 기분. 혼자라서 누군가와 대화할 수 있었고 여유로이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들. 적적해질 때 즈음 누군가 나타나 기쁨이 배로 느껴졌던 날. 말이 통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감정. 많은 것을 본 것보다 누군가를 만난 게 더 좋았던 여행. 깊은 여운 남기는 영화 10편은 보고 온 그런 기분 그래서 쉽사리 잊히지 않을 방콕 파타야.


그렇게 정신적으로 복구되기 힘든 몇 차례의 큰 사건을 겪은 후 ‘제천’의 지읒 자 만 들어도 신물이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날 이후로 제천 가는 일은 기존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나는 흔히 말하는 '멘탈이 약한 사람'이어서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멘탈의 약함과 강함을 떠나 중요한 건 내면의 상처는 계속해서 생겨나는 데 비해 그 상처가 치유되는 데는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었다. 상처가 아물고 있으면 또 다른 상처가 생기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치유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유난은 그만 떨고 싶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주말마다 고향을 내려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왜 고향에 애착을 갖지 못하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답은 늘 하나였다. 그들이 내게 준 상처. 언제쯤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상처들이 치유될 수 있을까. 우선적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들과의 거리를 두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다행히도 고등학교 졸업 후 제천을 떠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고모였다. 고모는 늘 따뜻하게 나를 안아주던 한 사람이었다. 또 그녀는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게 해준 한 사람이었다. 얼마나 큰 사랑을 가져야 그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녀는 내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자식 같은 조카가 잘 자라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고모에게 '조카한테 생활비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는 물음을 심심찮게 받았지만 생활비 한 번 보태라고 말한 적 없는 고모였다. 고모와 함께하는 동안 고모는 아무 싫은 소리 없이 나를 보살펴 주었다. 이제는 돈도 벌고 누군가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어서 예전만큼 고모의 도움은 받지 않게 되었지만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건 고모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복수는 사랑으로 하는 것처럼 과거를 증오하던 마음도 그녀의 사랑 안에서 서서히 녹아들기 시작했다.    

 

또한 불안정할 것만 같던 삶이 안정적으로 느껴지고 과거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바쁜 삶을 살아감과 동시에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만 같았다. 장거리 출퇴근이 흠이긴 했지만 왕복 2시간 30분 출퇴근이 단 한 번도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그만큼 너무 만족스러웠고 그만큼 너무 행복했다. 내게 주어진 일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 나를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니 삶의 질은 날로 높아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귀게 된 남자친구와 남들과 같은 데이트도 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여가 생활도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특히나 그때 시작한 아침 운동은 지금까지 내 삶의 큰 활력이 될 정도로 값진 도전이었다. 함께 일하는 선배님들을 보며 세상에는 내가 보고 자라온 것과 달리 화목한 가정도 많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내 주변의 환경이 바뀌면서 어둡기만 했던 사고방식이 조금씩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또 다른 문제를 직면하게 됐다. 다들 정규직을 운운하는 이유를 그제서야 알게 됐다. 당시 나는 프리랜서였다. 주변 선배님들은 그래도 프리랜서보다는 계약직이 낫다며 부장님께 계약직으로 바꿔달라는 얘기를 해보라고 말해주셨다. 몇 주 간의 사투 끝에 6개월의 근무를 끝으로 프리랜서에서 계약직으로 바뀌는 순간이 왔지만 그때 마침 다른 기회가 찾아왔고 나는 계약직으로 바뀜과 동시에 사직서를 내밀었다.     

스무 살에 싱가포르 어학연수를 다녀온 경험이 있다. 취업연계 프로그램이었어서 열심히 노력하고 그곳에서 머무를 용기만 있다면 나는 그곳에 머무를 수 있었지만 스무 살이라는 어린 나이가 걱정되어 한국을 돌아가게 됐다. 그리고 머지않아 후회하고 아쉬워했다. 회사를 다닐 때도 선배님들은 ‘내가 다시 너 나이로 돌아가면~ 나는 워킹홀리데이 가볼 거야~ 할 수 있을 때 해보는 건 나쁘지 않아. 나 봐 지금은 하고 싶어도 못하잖아.’ 그런 말들도 더불어 나를 간질였다. 나는 그렇게 해외에서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얻게 된 거다. 외국에서 살아볼 수 있다는 것. 나는 분명 큰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6개월간의 만족스러웠던 그리고 자랑스러웠던 나의 서울 회사 생활을 당당하게 그만두게 되었다.     


21살 때 홍콩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려 했던 적이 있지만 그때 고모의 전화 한 통으로 불가능하게 된 사연이 있다. 그때 나는 고모를 원망했었는데 고모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외국 가서 살면 뭐 달라질 줄 알아? 너 어디 팔려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하긴 나에게도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이 스물한 살의 여자아이라면 쉽사리 보내주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였을까 나는 계속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 스물세 살이 되던 해 나는 정말 떠났다. 하지만 고모의 말대로 외국 가서 산다고 뭐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채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신 있게 사표도 던지고 나왔건만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돌아오게 되어 많이 부끄럽고 창피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인의 기회로 공백 없이 바로 다음 일자리를 얻게 된 거다. 3개월 프로젝트 계약직이었는데 너무 박봉이어서 오래 할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인천-서울 출퇴근 교통비까지 고려하면 절대로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모쪼록 나는 그 삼 개월도 무사히 잘 마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삼 개월의 프로젝트가 끝나감과 동시에 결심했다. 혼자 여행을 떠나봐야겠다고.      


2017년 12월, 자발적으로 떠난 첫 해외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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