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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 Oct 29. 2020

가족이란 그럴 수 없는 관계


2019년 11월 1일     


벌써 11월이라니.. 새해를 결심하고 보낸 게 분명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너무 빠르다. 힘든 걸 남에게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글을 쓰는 것도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 게으름과 싸워야하고 과거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어제 집으로 오는 길에 동생과 대화를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엄마가 항암치료 중이란다. 그리고 머리를 다 밀었다. 그녀의 모습이 보고싶어 사진을 한 장 부탁했고 동생은 바로 엄마를 찍어서 보내줬다. 사진 속 그녀는 삭발한 채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렇게 가녀린 몸에 술도 매일같이 정신을 잃을 때 까지 마시니 그 몸이 어련할까. 어제 버스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리고 이 소식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내 자신이 너무 미워서 벤쿠버-시애틀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그녀는 또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오랜 기간 여행을 하는 중 어느 날 문득 가족들의 소식이 궁금해 동생에게 카톡을 보냈다. 밴쿠버에서 시애틀로 돌아오는 버스 안이었다. “엄마는 괜찮아?” 그랬더니 생각 밖의 답장이 돌아왔다. “엄마 지금 항암치료 중이야. 동생들이랑 다 같이 있어. 곧 전라도로 내려갈 거야.” 이어서 아빠의 소식을 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자리에 아빠는 없었다고 했다. 아빠는 요즘도 그렇게 술을 마시느냐 물었더니 당시 중학교 3학년의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지 뭐” 나는 아픈 엄마에게 섣불리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묻기엔 너무나도 어색한 사이인데다 수년간 제대로 대화나 통화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동생에게 다음 달 중에 엄마에게 돈을 조금 보내주겠다는 말과 엄마랑 가족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핸드폰을 내려 논 후 한참을 울었다.     

2011년 그녀는 췌장암에 걸렸다. 무슨 이유로 그 병이 걸린지는 모르겠다만 어린 나이였던 나는 당시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암'이라는 것은 그 단어만으로 사람을 좌절시키는 충분한 힘을 가진 병이었다. 그녀가 너무 안쓰러웠고 그녀를 그렇게 만든 술과 아빠를 원망했다. 나는 그녀가 아빠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아팠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분명 괴로워서 아팠던 거다. 아무튼 나는 그때 그녀의 췌장암 소식을 듣고 놀이터 앞에 앉아 친구에게 이곳으로 와줄 수 있느냐고 메시지 한 통을 남긴 후 벤치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고맙게도 친구는 곧장 내 곁으로 와줬고 괜찮아질 거라며 나를 달래줬다. 한 걸음에 달려와준 그 친구에게 아직도 많이 고맙다. 아무튼 그때 나의 심정은 ‘암’이라는 병이 그녀를 곧 죽일 것만 같았고 그래서 무서웠다. 그녀에게는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자식들이 있는데 그 당시에 동생들은 너무 어렸으니까 나는 별의별 경우의 수를 다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남겨진 동생들은 무슨 죄냐며 세상을 원망했다.     


다행히도 초기에 발견된 췌장암은 금방 완치가 되었다. 하지만 췌장암이 완치된 지 8년이 지나고 그녀는 유방암에 걸렸다. 처음에는 유방종으로 이 수술만 마치면 괜찮아질 거라는 의사의 말과는 달리 그 종양은 악성으로 확인되어 서울의 삼성병원으로 가봐야 할 거 같다는 결과가 나온 거다. 그렇게 삼성병원으로 옮겨진 그녀는 다행히도 수술을 잘 마쳤다고 했다. 그 버스 안에서 동생에게 가족의 소식을 묻기 전까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그녀의 소식을 알리는 아빠의 메시지를 보기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엄마의 유방종 소식이 있었을 때 할머니는 자꾸 아프다고 했다. 병원 좀 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제천 내의 병원에서는 큰 문제가 없으니 괜찮다고 했다. 당시 중국에 있던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매우 화가 났다. 할머니랑 가까이 사는 자식들이 세 명이나 되는데 제천을 벗어나 원주의 큰 병원이라도 데려가서 확인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계속 아프다는 할머니의 말대로 할머니에게는 문제가 없었던 게 아니었다. 엉덩이 쪽 뼈에 문제가 생겨 인공관절 수술을 받아야 했었다. 그러면서 고모는 내게 한국에 잠시 오는 날 할머니 간병 좀 할 수 없겠느냐 물었다. 내가 분노했던 것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두고 왜 자꾸 멀리 있는 나에게 부탁을 하는가였다. 그래서 당시 아빠에게 매우 화를 냈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엄마의 유방종 수술이었던 거다. 나는 미안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 무안했고 할머니와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유방 종이 유방암으로 번진 거고. 여차여차 대화 끝에 병원비는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카드 대출 500만 원을 받아서 해결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는 내게 말했다.      


섣불리 그들을 도와줄 수도 없는 내 상황이 미안했다. 돈이라도 많이 벌고 적금이라도 많이 해뒀다면 그깟 오백만 원 내가 다 부담하고 싶었지만 섣부르게 도와주겠다고 말을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당장 하루 한 끼 사 줄 돈은 됐어도 그녀의 수술비를 감당할 정도는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그들을 찾아가서 얼굴을 보지도 않았다. 가족들의 얼굴을 볼 염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명절에도 제대로 인사하지 않은 내가 무슨 염치로 그들 앞에 찾아가겠는가. 나에게는 아직 그들을 보러 갈 용기가 부족했다. 아빠는 늘 내게 메시지를 남기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덧붙여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그 힘들다는 말 한마디가 어릴 때와는 달리 바위가 심장을 짓누르는 것 마냥 크게 느껴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의 유방암은 매우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항암치료로 머리를 삭발했고 가슴 한쪽을 잃었다. 나는 아무런 안부도 묻지 않았다. 돈도 보태주지 못하는 내가 너무 미웠다. 이기적이지만 그저 서로가 짐이 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가족이란 그럴 수 없는 관계였다.    

 

2020년 4월, 할머니는 또 한차례의 골절 수술을 받게 되었다. 2018년 오른쪽 팔 골절 이후 벌써 네 차례의 골절이었다. 게다가 부러진 부위는 이 전에 수술을 받았던 오른쪽 다리였다. 나는 자꾸만 넘어져서 뼈가 부러지는 할머니가 미웠다. 할머니를 보고 있으면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살아왔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할머니는 예전의 멀쩡한 할머니가 아닌 것 같았다.      


자꾸 아프다는 할머니를 병원에만 데려갈 생각으로 방문한 제천이었지만 뼈가 부러졌던 그녀는 바로 수술을 받아야 했고 나는 10일이라는 시간을 할머니와 함께 보내기로 했다. 수술을 마치고도 자꾸만 이상한 소리를 하는 할머니와 어지간히 싸웠다. 4 인실에서 서로는 아주 큰 목소리로 싸웠다. 할머니는 아프지도 않은 지 목소리에는 늘 힘이 넘쳤다. 귀가 한 쪽이 들리지 않는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온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불안정하면 오른쪽 손은 사시나무 떨듯 떨렸고 내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불안한 모양인지 대변이 마렵다는 거짓말로 나에게 전화를 했다. 할머니가 분명 온전하지 않은 것을 알지만 할머니를 달래기보다 할머니와 싸우기 급급한 나였다. 답답한 마음에 그랬다. 그리고 할머니가 잠들 때는 몰래 울었다. 아침에는 나를 깨우는 할머니의 손짓마저 짜증 났다. 답답한 마음에 모든 게 짜증 나고 원망스러운 시간이었다.      


당시 코로나 사태로 환자의 보호자 1인 외에 병문안을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인천으로 올라가기 하루 전 병원 앞 작은 카페에 가족들이 모였다. 이번에 퇴원을 하게 되면 그녀를 잠시 요양원에 모시자고 말했다. 이제 다들 할머니는 수술을 무사히 마치는 것 만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의 다리가 완전히 나아서 걷는 데 문제가 없어질 때까지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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