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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 Oct 29. 2020

그런 그도 괴롭겠지


2020년 3월 5-8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달라져야할 건 나였는지도 모른다. 아빠는 여전히 술에 절어 살고 툭하면 취해서 전화하고 툭하면 삶이 괴롭다고 운다. 그 모습을 심각하고 애처롭게만 바라봤었는데 이제는 지겹다. 

제천 터미널이라도 데려다 주겠다던 아빠는 내가 사주겠다는 커피도 밥도 한사코 거절했다. 


그가 돈이 없는 만큼 내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도 아까운 걸 아는 아빠였다. 올해부터는 가족한테 좀 더 잘 하려고 한다. 보기 싫은 아빠는 아마도 많이 안 보겠지만 동생이나 할머니 엄마한테라도 좀 잘 해야겠다. 

지난번에 아빠는 내게 또 전화를 걸었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또 우는 아빠였다. 


참다못한 나는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니나 다를까 아빠는 본인이 먼저 전화한 것도 잊은 채 


“이제 나한테 전화하지마!!”


라고 했고


 “전화 안 해!”


하고 더 큰 소리를 지른 후 아빠가 뭐라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런 술취한 아빠는 받아주면 끝도없이 넋두리를 해대서 끊는 게 차라리 현명한 방법이다. 

     

오랜만에 동생들과 시간을 보내고 하소동과 시내를 둘러봤다. 제천은 변했다. 그런데 아빠는 변하지 않았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아빠는 자식에게 많이 도와주지 못하고 힘들게 만들었던 지난날들을 알아서인지 내가 성인이 되고나서 먼저 연락하거나 생활비를 좀 보태달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내가 먼저 돈을 보내달라고 하면 모든 상황의 탓을 나에게로 돌리면서 싸우기는 했어도 그가 먼저 내게 금전적인 부담을 줬던 날은 없었다. 서로에게 금전적인 것을 부탁하는 것은 금기사항과도 같이 여겨졌다. 아마도 도움을 줄 수 없는 그의 상황도 매우 괴로웠을 거라 생각된다. 그는 내게 금전적인 도움을 줄 수 없고, 나는 그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바랄 수 없으니 서로 간의 점점 연락은 뜸해졌다. 연락이 뜸해진 이유가 금전적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술에 취하는 날이면 내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면서 죽네 마네 하는 소리도 여럿 했다. 처음에는 그 전화를 거부하기가 무서워서 가만히 핸드폰만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술에 취한 그의 전화가 나를 너무 괴롭게 하면서 그의 전화조차 멀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도 깨달았는지 내게 전화 거는 일이 점차 줄었고 그러면서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날수록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조차 서로에게 어색해진 거다. 나는 아직도 그와 통화를 하면 1분을 넘기기가 힘들다. 물론 그와 통화를 하는 날도 거의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서로 부재의 시간을 갖고 살아가는 지금이 조금은 슬프고 미안하지만 편하다.     


모든 것을 잊은 듯 밝게 살아가다가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은 나를 참으로 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의 괴로움이 10이라면 그의 괴로움은 100일지도 모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날까지 그는 ‘아빠’라는 이름으로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 더 괴로울 법도 하다.     


한 손밖에 없는 채로 남들의 따가운 시선과 부딪히며 힘든 세상을 버티다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나’라는 자식을 낳았는데 나를 낳아준 그녀는 아빠와의 삶이 힘들다며 나를 데리고 도망쳤다. 처음에는 ‘나’를 잘 키우겠다고 데려갔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는지 아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다시 제천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나를 부탁했다. 그는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할머니 손에 길러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로 인해 할머니가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세 살이 되던 해 인천 고모 집으로 보내졌다. 나를 낳아준 그녀에게서 데리고 오는 길도 나를 고모네 집으로 데려다줬던 길도 그에게는 분명 가볍지 않은 길이었음을 안다. 어줍짢은 위로의 손길은 오히려 그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짓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어렸던 나는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그저 나중에 알게 된 사실들을 하나씩 퍼즐처럼 맞추어 나가다 보니 그의 삶은 분명 거칠고 힘들었다고 추측할 뿐.     


어느 순간 아빠는 개과천선을 하겠다고 결심을 했는지 그는 동네의 통장이 되어있었다. 새마을회 봉사도 하면서 나름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였지만 밤마다 술에 취해 가족들을 괴롭히는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병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남들과의 다른 손을 가진 사람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온 자격지심이 그를 많이 괴롭혔던 것 같다.     


학창시절의 내게 그는 술에 취하면 늘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너 내가 통장이랑 새마을회 왜 하는 줄 알아? 어디 가서 떳떳하게 네 아빠가 뭘 하는지 말할 수 있으라고, 쪽팔리지 말라고 통장도 하고 새마을회 봉사도 하는 거야! 너희들을 위해서 하는 거라고!”      


그는 늘 뭐가 그렇게 슬펐는지 눈물 콧물 다 흘려가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가슴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치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부모님이 무직이라서 혹은 우리 가족이 수급자라서 쪽팔렸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수급자인 게 편한 날이 많았다.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게 많았으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병원비 한 번 낸 적이 없었으니까. 나라에서 쌀도 주고 선물도 주고 그런 게 나는 싫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모든 상황이 너무 원망스러웠던 것 같다. 적어도 그의 오른쪽 손을 잃지만 않았어도 자격지심은 느끼지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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