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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 Oct 29. 2020

그동안의 착각


2019년 11월 23-24일     


칸쿤에서 플라야델카르멘으로 숙소를 옮겼다.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여기는 여행자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훨씬 많은 호스텔과 사람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인을 마주쳤다. 딸과 아빠가 함께 여행중이었다. 참 보기 좋았다. 부녀지간 친구처럼 여행하다니 나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렇게 다행히도 외롭지 않은 이틀을 더 보낼 수 있게 돼서 다행이었다. 함께 월마트에서 장을 보고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리고 밤새 지치지 않는 시끄러운 공연으로 간신히 잠에 들었다.     


다음날도 그 부녀지간 덕에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챙김을 받았다. 감사한 사람들이다. 셋이서 식사를 하고 언니가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아저씨는 내게 말을 걸었다.      


"아버지랑 안 친하지요?"      


아저씨는 나를 꿰뚫어보는 듯 말했다.     

 

“피가 참 들끓죠?”      


내 행동에 다 쓰여져 있다며 덫붙여 말했다.      


이 날 구하라가 죽었다. 아저씨는 이어서 말했다. 그렇게 계속 혼자만의 생각과 연민에 빠지는 건 나약한 거라며 아주 강인한 어투로 말했다. 아저씨는 체구가 작았지만 강한 사람이었다. 단단하고 큰 바위 같았다. 아저씨는 내게 돌려서 말하는 듯 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들었던 나쁜 생각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홀로 슬그머니 나와 카페로 들어갔다. 이유모를 서러움에 눈물이 나서 글로 털어버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술을 좋아하지 않고 자식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가정적인 부모님과 화목한 가정은 세상에 아주 드물게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천이라는 좁은 동네를 벗어나 짧은 시간이지만 대학생도 되어보고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을 경험하면서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를테면 술보다 가족이 먼저인 사람. 아내의 말이 부장님의 회식 권유보다 먼저인 사람. 그러면서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나도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용기. 주정뱅이에 불만만 가득한 사람 말고, 상처만 받고 자라온 사람 말고, 자격지심으로 매일 괴로워하는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용기가 생긴 거다.     


나 혼자만 넓은 세상을 구경해서 가족들에게 미안하지만 그 덕에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지구 안에서 그리고 여행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이 존재하는지 알게 됐다. 자라오면서 절대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스스로가 사랑이라는 것을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예전만큼은 두렵지 않았다.     


칸쿤에서 플라야 델 카르멘으로 발길을 옮긴 후 숙소에 도착한 날이었다. 그곳에는 한국인 부녀가 있었다. 아버지와 여행 중인 딸. 참 멋있는 부녀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내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밥은 먹었냐고 묻더니 점심에 남은 갈비가 있다며 어서 가서 먹으라고 나를 챙겨주었다. 항상 잘 먹어야 한다고, 눈치 보지 말라고. 삼일 정도 우리는 같은 호스텔에서 지냈다. 아저씨는 나를 문득 보더니      


“아버지랑 안 친하지요?”     


라고 물었다. 세상을 오래 산 사람들 눈에는 그런 게 다 보이는가 보다. 나는 그저      


“네”     


라고 짧게 대답했다.      


“피가 들끓는 사람이지요? 행동에서 보여요. 어디 가서 눈치 보지 말고 잘 먹어요.”      


아저씨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유명한 연예인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저씨는 다소 냉담하게 말했다. 자기만의 생각에 빠졌을 때를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자기만의 생각에 갇히게 되고 잘못된 판단을 하기 쉽다고, 그럴 때일수록 나를 아껴주는 사람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그런 생각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그 자리를 슬쩍 떠나 일기장을 챙겨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며칠간 밀린 일기를 쓰면서 울컥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어디서 나온 눈물인지 모르겠다만 가끔 따뜻함을 보면 나는 심하게 경직하고 어색해하곤 한다. 하지만 그날따라 울컥했던 마음이 들었던 건 내가 가족들에게 따뜻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리고 그 따뜻함을 너무 가까이서 느껴서 그리고 그동안 들었던 나쁜 생각들로 나 자신을 힘들게 했던 나 때문에 그랬던 거 같다.     


시간이 지나고 깨달았다. 사람은 단순히 누군가에게 깨달음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을. 그동안 내가 변한 행동을 보여준다면 아빠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을 줄 알았던 거다. 내면의 깨달음은 누군가 내게 줄 수 없는 거구나. 오롯이 나 스스로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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