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톡
기간을 정하지 않고 떠난 여행, 그저 돈이 다 떨어지면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시작한 여행의 첫 행선지는 블라디보스톡이었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 불리는 블라디보스톡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블라디보스톡에서 4일 정도 머무르는 일정으로 여행 계획을 세웠다. 첫 여행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정한 이유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여행을 떠나게 되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뭐,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정한 건 아니고 그냥 한 번 타보고 싶었다. 여행에는 굳이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가보고 싶은 곳에 가는 것이 여행이니까.
생각보다 일찍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했다. 여권에 도장이 찍히고 한국인이 없는 곳에 도착하니 러시아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여행은 낯선 것들의 연속이라는데 그 낯섦을 느끼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다. 휴대폰으로 데이터를 사용하기 위해 유심을 샀는데 카카오톡이 실행되지 않았다. 그 당시에 나는 이제 여행 시작인데 카톡이 안돼서 순간 당황을 했다. 다행히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가 가족들에게 연락을 해줘서 무척이나 고마웠다. 여행의 시작부터 연락이 안 되면 가족들이 걱정할까 싶어 걱정이 됐는데 결론적으로는 잘 해결이 돼서 불편함 없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해외여행을 했을까. 멀리 여행을 나왔지만 나는 한국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부모님에게 연락을 더 자주 했다. 이것이 여행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까.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카우치 서핑으로 숙박을 해결했다. 카우치 서핑은 현지인이 사는 집에 빈 방이나 소파 등에서 숙박을 하며 머물 수 있는 시스템이다. 호스트는 돈을 받지 않고 숙박을 제공해 준다. 물론 호스트가 일정 조건을 거는 경우도 있고 기준이 까다로운 사람도 있다. 일단 호스트가 승인을 해줘야 카우치 서핑을 통해 숙박을 할 수 있는데 나는 다행히 첫 여행부터 좋은 호스트를 만났다. 카우치 서핑을 잘 이용하면 현지인 친구를 빨리 사귈 수 있고 여행하는 나라의 문화와 여행지 등을 추천받을 수도 있다. 나는 정말 운이 좋게도 호스트를 잘 만나서 블라디보스톡에 머무는 동안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카우치 서핑 호스트 이름은 마리나, 블라디보스톡 외곽에 있는 아파트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살고 있는 친구였다. 라오스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다가 얼마 전에 블라디보스톡에 돌아왔다는 그녀는 귀국 전에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무척이나 좋았다며 나를 친구로 받아주었다. 심지어 내가 도착한 날에 마리나의 집에서 귀국 축하 파티가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리나는 내가 공항철도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역에 도착했을 때 마중을 나올 정도로 친절했다. 역 앞에서 그녀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마리나의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당시 버스에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는데 버스가 고장 나서 마리나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내려서 다른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내 배낭이 커서 현지인이 뭐라고 말을 했었는데(나는 러시아어를 몰라서 뭐라 했는지는 모르지만) 마리나가 화내면서 그 사람에게 한 소리 해줬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버스를 갈아타고 종점에 내렸다. 마리나의 집은 버스 종점 해변가에 위치한 아파트였다. 외곽에 있는 아파트라 편의 시설은 거의 없었지만 바닷가가 가까워서 집 안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경치가 무척 좋아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바깥 풍경을 감상하곤 했다. 내가 머무는 동안 나 말고도 다른 카우치 서핑 게스트가 잠시 머물렀는데 그는 히치하이킹으로 여행 중인 러시아인이었다. 마리나가 그 친구와 함께 바다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해서 바닷가로 갔다. 마리나가 시크릿 로드를 알려줘서 비포장길을 따라 바닷가로 향했다. 굽이굽이 풀이 우거진 길을 따라가다 보니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마리나가 알려준 바다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유명한 마약(Mayak) 등대가 있는 해변이었다. -이렇게 글을 쓰며 알게된 사실인데 마약이 러시아어로 등대라는 뜻이라고 한다.- 여름이라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등대로 가는 길은 바다로 이어져 있는데 물이 깊지 않아 쉽게 건널 수 있다. 시간대를 잘 맞춰 썰물 시간에 가면 바다에 잠기지 않은 자갈길을 건널 수 있는데 내가 갔을 때는 바다로 잠겨 있는 시간대였다. 그렇지만 마리나가 아니었다면 가볼 생각도 못 한 곳을 둘러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여행의 시작이 이렇게 좋다니. 시작이 너무 좋아서 였을까 마리나의 집이 내 첫 카우치 서핑이자 마지막 카우치 서핑이 되었다.
※ 2017년 7월 ~ 2018년 4월에 떠났던 여행을 다시 기록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