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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yarel Dec 23. 2018

해외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9개월 아이와 베를린 생활을 시작하다


아이와 독일을 가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세 식구가 함께 있을 수 있단 점에서였다. 출산 후 3개월 만에 내가 직장에 복귀하면서, 아이는 부산에 있는 친정에서 크게 됐다. 1주일에 한번, 일이 많으면 2주일에 한번 만나는 주말 가족생활이 시작됐다. 베를린에 가게 된다면 내 커리어는 단절될 것이다. 양가 어른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사실상 한국에서도 육아를 전혀 혼자 해보지 않은 내가, 육아를 그것도 타국에서 잘 해낼 자신도 없다. 아이 때문에 마지막까지 망설였지만, 그래도 아이 때문에 용기를 냈다. 어느 날 따져보니 인생에서 이렇게 온전하게 우리 세 식구가 함께 있을 날이 얼마 안 될 것 같았다. 독일에서 돌아온 후에도 아마 우리는 서울에서, 아이는 부산에서 지낼 확률이 높았다(실제 그렇게 됐다). 당장은 멀어 보여도 머지않아 학교에, 학원에 아이가 우리보다 더 바빠질 날도 올 것이다.


타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많은 것을 배우고 포기해야 하는 일이었다. 소아과 진료를 보는 사소한 일부터, 예방접종 체계까지 다 달랐다. 독일은 관공서를 비롯해 대부분이 예약제라 아프다고 해도 아무 병원에 무작정 가면 안된다. 소아과 선생님을 한분 지정해 우리 아이의 담당의가 돼 달라고 한 다음, 매번 예약을 통해 그 병원 선생님께 가야 했다. 하람이는 유년기를 한국과 독일에서 지냈다는 이유로, 예방접종도 다른 한국 아이들보다 몇 번 더 했다. 이유식, 유아식도 한국과 다르니 사서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귀국 몇 달 전에는 한국에서 가져간 전기밥솥도 고장 나 매 끼니 냄비밥을 했다. 친정·시댁 찬스는 당연히 쓸 수 없고, 부부가 노동력을 쪼개가며 서로를 도와야 했다. 둘 중 한 사람이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 좋다는 베를린 필하모닉도 그 주변을 매일 산책하면서 공연을 한 번 같이 못 봤다. 아이와 함께 셋은 힘들고, 부부가 둘이 가면 아이 봐줄 사람이 없었다. 7시면 취침하는 아이를 두고 저녁 외식은 당연히 꿈도 못 꿨다. 독일을 떠나기 마지막 주에야, 처음으로 5시쯤 가족이 다 같이 저녁 외식을 했다. 저녁 해도 길어지고 아이의 취침시간도 다소 늦어져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겨울이 힘들었다. 독일 가기 전, 독일에 살았던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 공통된 얘기 중 하나가 ‘독일의 겨울이 정말 지독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이 말을 엄청 춥다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겨울 옷을 바리바리 싸갔다. 그러나 정작 독일에서 보낸 겨울이 그리 춥지는 않았다. 서울처럼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은 드물었고, 영상을 유지하는 날도 꽤 있었다. 대신 우리는 알게 됐다. 독일 겨울이 다른 의미로 지독하다는 것을. 11월 정도가 되니 해가 점점 늦게 뜨고, 빨리 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엔 오전 8시가 다 돼서야 해가 뜨더니, 오후 3시 30분이면 해가 졌다. 이 시간마저도 쨍쨍한 해가 뜨는 게 아니라, 비 오는 날 한국 오후처럼 해가 떴다. 해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우울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독일에 가서야 알았다. 독일의 우울한 날씨 때문에 철학자가 많이 나왔다는 소리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실제 겨울철 우울증 환자가 증가하고, 이에 따른 대처법이 지역신문에 자주 실렸다. 잡지에선 햇빛 쬐기 좋은 장소 순위를 소개해줬다. 소아과 선생님은 아이에게 비타민D를 처방해주셨다. 비타민D는 햇빛을 많이 쫴야 생성되는 비타민으로, 독일에선 결핍되기 쉽다.


이런 계절적 특성 때문에 독일은 서머타임제를 운영한다. 여름에는 평소보다 한 시간 당겨 생활하고, 겨울에는 이를 다시 늦춘다. 서머타임 때는 오전 7시였던 것이, 겨울에 들어서면서 오전 6시가 되는 것이다. 아이가 이 서머타임을 알 턱이 있나. 저녁 7시가 되기 전 잠에 들어 오전 6~7시면 기상하는 아이는 서머타임이 끝나거나 말거나 똑같이 일어났다. 다만 어제 오전 6~7시가 오늘은 갑자기 시계상으로 오전 5시~6시가 됐다는 것이다. 겨울이 되면서 활동량이 줄고, 햇빛도 많이 못 쬐면서 아이의 수면량 자체도 30분~1시간 정도 줄어들었다. 저녁 6시 반쯤 잠든 아이가 오전 4시 30분에 일어날 때도 있었다. 정말이지 해도 뜨지 않는 겨울의 새벽 4시 반에 일어나는 건 별 보고 학교 가 별 보고 집에 오던 고 3 시절, 경찰서에서 24시간을 내던 수습기자 때보다 더 힘들었다. 오전 5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남편과 나는 서로 눈치를 보며 버텼다. 먼저 일어나는 건 고맙게도 항상 남편이었다.


솔직히 아이 없이 남편과 둘만 왔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 적이 있다. 여유 있게 늦잠도 자고, 노이 쾰른에 위치한 힙한 식당에서 브런치도 먹고, 저녁 늦게 베를린 필 공연도 관람했을 것이다. 나는 여유롭고, 자유로웠을 것이다. 여느 관광객만큼 베를린을 즐겼을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한 인생에서 내가 몇 안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이와 함께여서 우리의 독일 생활은 말도 안 되게 더 값졌다는 것이다. 아이가 있어 우리는 관광객 놀음을 못했다. 대신 매일매일을 살았다. 맛있는 식당·알려진 장소를 돌지 않고 집 주변 공원을 산책하며 토끼를 보고,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 아빠와 모래흙을 파며 육아애(愛)를 피웠다. 아이는 우리 부부를 더 많은 사람과 연결시켜줬다. 영어 잘하는 30대 젊은 부부는 사실 타국에서 현지인 도움이 없이 자립이 가능하다. 아이가 있으면 얘기가 다르다. 소아과도 한 달에 한 번 이상 가야 하고, 식당에 가도 아기 의자가 어딨냐고 물어야 하고, 비행기를 타도 옆 사람과 아이 얘기를 한 번은 나눈다. 아이는 단순히 한 사람 분량의 삶을 더하는 게 아니었다. 아이는 어른 열명이 모여도 못 볼 시각과 경험을 더해줬다.


그럼에도 문득 하루하루를 놓치고 있다는 두려움이 들 때가 있었다. 특파원으로 온 남편은 하루하루의 시간이 경력으로 쌓여가는데, 나의 경력은 깎이기만 하는 것 같을 때 말이다. 독학으로 독일어 공부도 하고, 틈틈이 일상 기록도 남기려 했는데 그 마저 잘 안 되는 날이 있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했다는 허탈감이 찾아왔다. 어느 날도 그랬다. 아이 밥을 먹이고, 치우고, 씻기고, 재우니 하루가 금세 없어졌다. 녹초가 돼 침대에 누운 남편을 붙잡고 “오늘 하루 아무것도 못했다”라고 자조했다. 남편은 답했다. 하람이가 일기를 쓸 수 있다면, 오늘 엄마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내 더 행복했노라고 쓸 것이라고.


나의 베를린 일기는 하람이의 입장에서 쓴 것이다. 여느 관광지 방문기도 없고, 맛있는 식당 추천도 못한다. 다만 하람이와 보내 더 행복했던 시간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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