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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나 작가 Jan 25. 2024

염색을 좋아하면 위험해져요

탈모 탈피 To do list 첫 번째 항목 - 염색


과감한 헤어컷 감행했다. 헤어숍 원장님께서는 신년 초부터 탈모 클리닉을 방문했던 내 고백을 들으시더니

"뭐, 이참에 손상되어 있던 머리를 다 쳐낼까 봐요."라며 넉살 좋게 응수하셨다. 마치 내가 느낄 무게를 덜어 내주듯 말이다. 따뜻한 원장님께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원장님과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며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잘라 내려갔다.


십 분쯤 지났을까. 머리통을 받치는 경부가 한결 가벼워졌다. 헤어컷이 끝나고 나서 바닥에 널브러진 내 머리카락을 훑어봤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머리카락을 보자 이내 마음 한 칸이 쓸쓸해졌다.  몇 년간 나와 동고동락했던 동무가 영원히 떠나간 것 같았다. 등 뒤쪽에서 느껴지는 싸늘함에 너무 많이 자른 건 아닌지 살짝 후회도 밀려왔다. 이제 와서 다시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머뭇거리며 자리를 못 뜨고 있는 내게 원장님은 훨씬 젊어 보인다며, 새해를 맞아 상큼하게 잘랐다고 위로해 주셨다. 머리는 기어이 다시 자란다는 원장님의 위안을 들으며 이별을 고한 내 머리카락을 휴대폰에 담았다.

잘 가, 얘들아. 그렇게 씁쓸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머리를 자른 후, 원장님과 염색에 대해 논의하다가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 염색이 스트레스와 더불어 탈모를 유발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탈모클리닉 원장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주일 뒤, 뿌리 염색을 하러 헤어숍에 다시 방문했다. 뿌리 염색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한참을 망설였다.


"어떻게, 그래도 염색하기로 결정하셨네요. 저희 아버지도 탈모셨는데 이 천연 염색으로 염색하기 시작하시더니 예전처럼 안 빠지더라고요. 괜찮을 거예요."

원장님께서 내가 탈모 중기라는 상황을 알고 계셔서 그런지,  어려운 발걸음에 용기를 건네주셨다. 탈모클리닉에서 상담한 이후로 염색에 대해 알아보니 이러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독한 화학 성분이 가득한 염색약을 머리에 바르면, 염색 과정에서 두피에 묻고 또 머리카락을 통해 두피로 염색약이 두피로 흡수되기에 이로울리 만무하다. 또한 염색 과정에서 두피에 묻은 염색약은 머릴르 감는다고 해도 쉬이 물이 빠지지 않아 해롭다.  한마디로, 탈모를 탈피해야 하는 이 시점에는 탈모를 유발하는 염색을 하면 안된다. 


그럼에도 염색을 결정하게 된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뭐, '작가'라는 직업과 나이를 고려한다면 굳이 염색을 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천녀유혼'에 나오는 귀신 여주처럼(여기서 나이대가 자동적으로 산출된다) 반짝이는 백발에 도전해 볼까도 고민해 봤다. 단 한 번의 백발로 매번 뿌리 염색에 대한 고민 없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두 눈 질끈 감고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작년에 백상예술대상에서 수상하신 김은숙 작가님만 해도 백발이 멋들어져 보였다. 그러다가 일반 작가가 아니라 무려 김은숙 작가님이라서 그러신 건 아닐까, 그냥 귀신이 아니라 여주가 '왕조현'이라서 빛났던 건 아닐까 싶었다. 기품 있는 김은숙 작가님과 백발로 변신한 내 모습을 머릿속에서 오버랩다가 백발은 당분간은 제쳐두기로 했다.

 


그리고는 그냥 염색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나이'에서 찾기로 했다. 마흔 중반에 흰머리가 있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난 부모님 덕분에 또래에 비하면 흰머리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엄마, 아빠도 흰머리가 느지막이 나셨다. 이참에 흘러가는 세월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중년의 자세로 전향할까, 골몰해 봤다.  나쁘지 않았다.

혹해서 흰머리를 안고 사는 삶을 그리고 있을 때, 갑자기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는 덩치 큰 남편이 눈에 들어왔다.


'아, 내 인생에 저분이 있었지.'


새카맣고 숱이 풍성한 삼십 대 남성, 남편.  안 그래도 타고난 머리색이 검은색에 숱이 많은데, 창문에서 새어 들어온 햇볕을 받아서 그런지 이 날따라 유독 새카맣게 보였다. 그때부터 남편이 계속 신경 쓰였다. 연하 남편이 내 머리 염색 여부 결정에서 고려해야 할 요소가 될 줄은, 그와 손잡고 식장을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변수이다. 남편은 평소 내 외모나 취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왠지 연상인, 내가 알아서 관리를 해줘야만 할 거 같았다. 어쩌면 마음 한 구석에 있는 전히 싱그럽고 어여아내이고픈 욕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내 3시 방향, 9시 방향, 12시 방향으로 재빠르게 움직여가며 내게 기관총을 쏴대는 아홉 살 아들도 마음에 걸렸다. 

'아차, 이 녀석도...'

매년 학기 초 학부모 참관수업이나 상담이 있을 때면, 환한 미소로 엄마를 반기는 우리 아들이 있지. 두 달 반 뒤면 또 학부모 참관수업이 있을 텐데, 다른 엄마보다 나이가 좀 더 많으니 더욱 관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제 내 나이는, 온전히 만의 것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열세 살 어린 연하 남편과 아홉 살 늦둥이 아들 때문에 염색을 하기로 결단 내렸다. 인생은 나 홀로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염색 결정에서 다시 한번 체감하게 되었다. 헤어숍 원장님께 이런 속사정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으니 원장님께서도 맞장구를 치셨다.


"저도 얼마 전에 남편이 제가 하도 중학생인 딸아이 옷을 입으니까 한 소리 하더라고요. 당신 옷이 없냐고, 왜 자꾸 애들 옷을 입냐고요. 남편이 무관심한 거 같았는데, 또 그렇지만도 않은 가봐요."


원장님 말씀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원장님 남편분도 그러셨구나! 저는 검정 팬티랑 살색 팬티를 사려고 했거든요. 한데 주문하려고 했더니 남편이 살색 팬티는 자기 앞에서 입지 말아 달라고 처음으로 지나가듯 말하더라고요. 원래 제가 하는 일에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속으로 좀 놀랐어요. 그후로 더 신경 쓰요"


배우자를 살피며 사는 두 여자는 별스럽지 않지만 뼈가 담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하하 호호 웃었다. 원장님께서는 대화하는 사이에 원장님 부모님께도 하신다는 천연 염색약을 준비해 오셨고, 천연 염색 재료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염색을 위해 불가피하게 2% 정도 화학 약품이 있지만 그 외에는 모두 허브 성분인 가장 순한 천연 염색약이라고 하셨다. 설명을 들으니 묵직했던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그래, 젊고 어린 가족구성원을 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나도 어느새 주기적으로 염색을 하는 사람이 되었구나, 헤어숍 자리 앞에 놓인 큰 거울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가 우리 엄마가 된 거 같았다. 엄마가 이렇게 자주 염색하셨는데. 엄마 따라 쫄래쫄래 미용실에 가던 어린 시절이 잠시 소환됐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은 멀쩡해 보이지만 나도 어느덧 엄마들 나이가 되었다는 걸, 웃을 때 양 눈가에 잡히는 쭈글쭈글한 주름이 말주었다. 그 누구세월이라는 빗방울은 피할 수 없나 보다.


탈모인은 거스를 수 없는 세월과 자기 관리를 중요시하는 요즘 세상 사이에서, 흰머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천연 염색을 하는 나 역시, 예전처럼 뿌리 염색을 한 달 반에 한 번씩 하지는 못할 것 같다. 아무리 천연이라 한들, 약간의 화학 성분이 포함되어 있으니 탈모를 막기 위해 염색 주기를 좀 더 늘려서 두세 달에 한 번씩 해야지 싶다.  


안타깝게도 모발색 관리에 있어서는, 우리 탈모인에게 널따란 선택지는 없는 것 같다. 내가 고심 끝에 결정한 것처럼 '천연 염색약'으로 드문드문 염색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혹은 평소 새치샴푸를 사용하는 것도 좋은 관리법이다. 하나, 딱히 고려해야 할 가족이 없거나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면, 매년 찾아오는 나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표현하며 점차 백발이 늘어가는 삶을 받아들이는 것도 꽤 마땅한 선택일 것이다. 


한 시간에 걸쳐 만족스럽게 천연 염색을 마쳤다. 어제 친 단발로 짧고 가볍다. 이렇게 탈모클리닉에서 배운 것들을 하나하나 삶 속에서 실천해 본다. 덩그라니 비어있던 모공에서 자라날 새로운 머리털을 그리면서.  






-  To be continued on Thursdays


천연 염색한 다음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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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브런치북] 스치듯 탈모 : 탈모 탈피 백서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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