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니!
들을 때마다 힘을 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 남의 얘기. 실제론 알지도 못하고 평생 마주쳐 이야기 나눠볼 일조차 없는 사람의 이야기. 그런데 힘이 나는 이상한 이야기. 마치 내 얘기처럼 주변에 알려주지만 실은 완전한 남의 이야기. 그것도 외국 이야기. 왜 때문에 나만 신나서 떠드는 이야기. “어이, 재밌는 얘기가 하나 있는데, 들어볼래?” 그러나 이야기의 중반부를 막 지나갈 무렵, 도통 관심 없는 상대의 눈빛을 눈치채고 앞선 반토막을 내 입으로 도로 집어넣을 순 없나, 땅을 치며 후회하는 이야기. 하지만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썰자며 일단 질러 보는 이야기. 내가 실제로 본 것도 아닌데, 관련 인터뷰를 하도 많이 돌려봐서 직접 체험한 것마냥 생생한, 뭐 그런 미친 이야기가 있다.
래퍼 빅션의 아마추어 시절 이야기, 나는 이 이야기가 그렇게도 좋다. 고등 래퍼 빅션이 그의 고향, 디트로이트의 지역 방송국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랩 경연(Friday Night Cypher)에 참가하며 랩 스킬을 갈고닦던 때의 이야기.
은행의 텔레마케터로 주말 알바를 뛰던 고등 래퍼 빅션에게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칸예가 방송국에 떴어!
얼른 튀어 와서 계약하라구!
래퍼 카니예 웨스트가 그의 정규 2집 앨범 <Late Registration>의 홍보 차 고등 래퍼 빅션이 매주 금요일마다 랩 배틀로 활약하던 라디오 방송국에 들렀다는 소식을 듣게 된 준비된 남자 빅션은 자신의 데모 CD를 들고 그를 만나러 튀어 간다. 텔레마케터 알바가 뭔 대수였겠는가! 무적권 달려!
라디오를 마치고 다음 스케줄로 향하는 바쁜 래퍼 카니예 웨스트를 멈춰 세운 고등 래퍼 빅션, 이어지는 그의 멘트가 환상적이다.
당신을 위해 랩 해봐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얘기할래요, 용기내볼래요. 이건 뭐 유리상자도 아니고.
아무튼 바쁜 척하며 가던 길 가려던 칸예를 붙잡은 고등 래퍼 빅션, 간절한 빅션을 보고는 마지못해 한 마디 툭 던지는 칸예.
“아놔, 시간 없는데,
오케이!
방송국 나가는 동안
16마디만 털어봐.”
준비된 고등 래퍼 빅션의 랩을 들으며 복도를 걸어 나가던 칸예, 방송국 문 앞에 다다르더니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버블 헤드마냥 고개를 흔든다.
“오, 씥, 좋은데?”
-버블헤드좌 칸예-
결국 10분을 내리 랩한 고등 래퍼 빅션, 그리고 그는 칸예에게 데모 CD를 전달한다. 그렇게 고등 래퍼 빅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데.
얼마 전, 래퍼 빅션이 그의 정규 5집 앨범 <Detroit 2>를 발매했다. 아놔, 거를 노래가 별로 없다. 큰일이다. 아니, 수확의 계절 아니랄까 봐 요즘 미국 힙합 씬에는 매일 좋은 앨범들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온다. 죽을 맛이다. 괜찮은 앨범이 매일 같이 튀어나오니 불안해서 누군가의 앨범 하나를 온전히 즐기질 못한다. 스트리밍의 시대, 확실히 앨범 단위로 음악을 진득하게 듣는 게 힘든 요즘이다. 그럼에도 끈기를 가지고 앨범 하나당 몇 바퀴씩은 돌리려고 애쓴다. 그게 힙합 아티스트를 존중하는 힙찔 리스너로서의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앨범 하나를 최소 두 바퀴 정도는 돌려야 아티스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어느 정도 가슴에 전달된다. 아놔.
빅션의 이번 앨범 <Detroit 2> 속 19번 트랙의 타이틀, 'Friday Night Cypher'는 고등 래퍼 빅션이 매주 금요일마다 참가하던 지역 방송국의 프로그램 제목과도 같은데,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래퍼 에미넴을 위시로 한 디트로이트 출신의 래퍼들이 떼거지로 모여서 함께 랩한 것으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앨범의 수록곡을 소개하려던 건 아니었기에 이쯤에서 그만.
아무튼 방송국 복도를 걸어 나가는 래퍼 칸예를 졸졸 따라가며 랩하던 아마추어 고등 래퍼 빅션, 훗날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성실하게 방송국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랩 가사를 준비하고, 랩 스킬을 연마하던 매일의 노력을 통해 방송국과 호의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고, 이는 고등 래퍼였던 자신이 방송도 없는 토요일 오전에 래퍼 칸예를 영접하기 위해 방송국 복도까지 기어들어갈 수 있는 행운을 불러주었다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있는데,
한 가지 일이 다른 일을 부르고,
그 일이 또 다른 일을 부르고,
또 그 일이 또 다른 일을 부른다는 겁니다.
언뜻 중요해 보이지 않는
어떤 일이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 인생의 가장 커다란
사건이 될 수도 있다는 거죠.
-깨달음좌 래퍼 빅션-
준비된 자에게 행운이 깃든다거나 기회를 잡는 운도 준비된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의 세련된 실례가 바로 고등 래퍼 '빅션'과 '칸예'의 운명적 만남이 아닐까. 아놔. 정말 멋진 이야기다. 매일 곱씹어도 안 질린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오늘은 래퍼 빅션의 이번 앨범 수록곡을 소개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글을 마무리하는 기념으로다가 추천곡을 하나 뿌려보겠다.
이번 앨범 <Detroit 2>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7번 트랙 'Harder Than My Demons'이다. 과거의 아픈 시간을 딛고 일어선 래퍼 빅션이 가스펠 맛 업비트 위에서 자신의 재기를 시원하게 선언한다. 노래를 한 줄로 정리하자면 신께서 나를 빡세게 일하도록 밀어붙여주었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의 강도가 어느 정도냐면 나의 안팎에서 내 앞길을 방해하는 악마보다 빡세게 뛰어다니도록 해주었다는 것. 다시 말해 악마를 쥐어 패고 일어설 정도로 허슬한다는 이야기. 2분짜리 곡인데, 다 듣고 나면 에너지가 불끈불끈 솟는다. 래퍼 빅션이 종교가 없는 스눕피의 엉덩이까지도 신의 채찍으로 후려갈기며 안주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데, 어쩔 도리가 없다. 아놔.
래퍼 빅션과 관련한 스눕피의 이전 글이 궁금하신 선생님들께서는 아래 포스트를 읽어봐 주시길 바랍니다.
https://brunch.co.kr/@0to1hunnit/193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