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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K May 19. 2019

"동시상영작_모녀 성장기."

레이디 버드(2018)

이 영화는 모녀의 애증과 융합관계에서 건강하게 분리되어가는 모녀 성장 영화다.

거윅 감독은 처음에는 제목을 ‘엄마와 딸’이라고 하려고 했을 정도로 지극히 일상적인 우리 가족 이야기다.      

 

_첫 번째 영화: 소녀 "크리스틴"의 성장기      


# I'M '자유 숙녀(LADY BIRD)'

 

여고생 '크리스틴'은 스스로 이름을 짓는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부정한 채. 자신을 높이기 위해 호(lady)를 수여하였다. 마치 여왕이 기사 작위를 내리듯이. 이름은 새(bird). 새는 <자유>를 의미한다. 어디에도 메이지 않고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존재. 그럼 둘을 합치면 "자유 숙녀" 정도가 될까.    

 

소녀는 누구로부터 존중받고 싶었을까?

아마도 가족, 특히 엄마였을 것이다. 매 순간 엄마에게 관심받고 사랑을 확인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엄마의 집착으로부터 탈출하고 싶고, 자신을 죄이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으리라.     


소녀는 무엇으로부터 날아가고 싶었을까?

엄마의 잔소리, 가난의 굴레, 채바퀴 돌듯 지겨운 일상, 누가 사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한 고향 "새크라멘토"를 떠나서 매일 새로운 사건들이 빵빵 터지는 스펙터클한 세계로 날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들로부터 탈출해서 "나(idendity)"의 몸집을 키우고 싶지 않았을까.     


크리스틴은 매번 이름을 <레이디 버드>라고 정정한다.


# 연애, 키스, 섹스가 궁금해. 몹시!     


첫 키스의 주인공이자 첫사랑, ‘대니’.

그는 참 자상한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남자였다. 연극을 하며 둘은 예쁘게 사귀게 된다. 격렬하게 첫 키스도 나누고 밤하늘을 이불 삼아 누워서 <자신들의 별>을 정하고 별 이름도 멋있게(허세 작렬하게) 지었다. 세상이 모두 우리를 향해 축복하는 것 같은 완벽한 순간들이었다. 너무 사랑하고 아끼므로 순결을 지켜주고 싶다던 배려 깊은 남자 친구가 사실 '동성애자'인 것을 알고는 큰 상처를 받는다.


만화 <캔디>의 '안소니' type 남친,  <대니>


첫 관계의 주인공이자 두 번째 남자 친구, ‘카일’.

밴드에서 기타 연주를 하고 알 수 없는 철학서적을 든 그는 무언가 남달라 보였고 그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크리스틴'은 반한다.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절친 '줄리'를 버리고 '제나'(반에서 잘 노는 소녀)와 '카일 멤버'들과 어울린다. 잘생긴 외모와 지적인 이미지, 동정(나중에는 아니었음이 밝혀졌지만) 등 더없이 완벽해 보였기에 그와 첫 섹스를 가진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편협하고 가식적인 소년에 불과했고 그들과 어울린다고 '인싸'가 되고 '신분상승'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다 부질없었음을.


우수에 가득 찬 <제임스 딘> 느낌의 남친, <카일>


# 돌다 돌다 결국 제자리를 찾아가다.


'카일'과 (잘 나가는)'제나'와 더 친해지기 위해서 (덜 나가는)'줄리'와의 우정을 저버렸고, '카일'과 그 무리에 어울리기 위해 거짓말로 "가짜 자기"를 만들고 배척될까 두려워 제 욕구는 숨긴 채 늘 맞추어 주었다.

"난 무도회에 가고 싶어. 내 베프 줄리의 집에 데려다줘."

'크리스틴'은 진실을 가렸던 <안개 같은 환상>이 사라진 후 "덧없는 가짜"를 버리고 "소중한 진짜"를 되찾으러 달려간다.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 소중한 것을 깨닫고 행동으로 움직인다. 그녀에겐 큰 전환점이었다. 그녀에게 '줄리'는 오랜 세월, 즐거우나 슬프나 함께 하며, 하늘의 별보다 많았던 고민과 감정을 진솔하게 공유한 베프였다. 그녀의 집을 찾아가 '줄리'를 위로하고 수다를 떨며 밤거리를 누비며 미래에 대한 꿈을 나누는 둘의 모습은 어느 데이트보다 사랑스러웠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된 <크리스틴>은 소중한 것 <베프 줄리와의 우정>을 되찾고자 한다.


_두 번째 영화: 엄마 "매리언"의 성장기    


# 엄마는 매일 바쁘다    


'데니'는 '크리스틴'에게 말했다. "너희 엄마는 늘 화 나 있어." 그렇다. 그녀의 표정은 늘 굳어있다. 엄마 '매리언'은 항상 바쁘고 마음의 여유라곤 없다. 남편은 실직했으며, 두 자녀에 (집에서 쫓겨난)아들의 여자 친구까지 다섯 식구 입에 풀칠을 감당해야만 하는 가장이다. 출근 전에 가족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먹이고 치우고 세탁도 해야 한다. 추수감사절 남친의 집을 방문하는 딸을 위해 <아웃렛>에서 고르고 골라온 드레스를 더 예쁘게 입히기 위해 수면을 반납한 채 밤새 수선한다. 부족한 수입을 채우기 위해 수당이 나오는 야근과 주말근무까지 한다. 한 달에 며칠 안 되는 휴일은 상처 받은 딸의 마음 돌봄을 위해 딸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집 보러 다니기)를 위해 온전히 하루를 쓴다. 숨 막히는 바쁨이다.


# 매일 숙제하는 엄마, 그래서 화난다  


'메리언'의 엄마는 알코올 중독에 가정폭력 가해자였다. 본인은 방임된 채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아프고 외롭게 컸기에 딸에게 더욱 잘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의 직업이 정신과 의사(혹은 상담사)로 간 것도 이해가 된다. 누구보다 상처를 많이 받았기에 또 다른 자신(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보살피고 헤아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단 한 명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자신- 의 감정 돌보기는 항상 유보한 채 내담자들의 마음을 살피고, 촉수를 세워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모습은 참 힘겨워 보인다. 매일 "숙제" <딸은 나처럼 애정결핍을 느끼게 해선 안되고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한다>를 실천하는 그녀의 최선은 너무나 비장해서 이를 꽉 물고 참는 모습이 늘 화난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힘겨운 투쟁은 수시로 짜증으로 튀어나온다. "넌 너 밖에 모르지. 가족들에게 관심이 없어." "추수감사절에 가족을 두고 남자 친구 집에 가야겠어."... 때때로 (엄마들의) 자기 돌봄 없는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과부하된 희생>은 뾰족한 화살이 되어 상대방의 심장에 꽂힌다. 시작과 의도는 상대를 위한 사랑이고 배려였으나 억지스런 희생은 때때로 관계를 파괴한다.


너무 닮은 모녀, 애증의 관계


# 고슴도치 같은 두 모녀     


'크리스틴'의 아버지는 말한다. "둘 다 너무 강해." 둘이 서로 닮았다고. 서로가 너무 소중하고 사랑하기에 안고 싶지만 서로의 뾰족한 가시에 찔려서 아파하고 (상대의 가시를) 싫어한다. 자녀 중에 더 아픈 손가락이 있다. 그 자녀를 보면 마치 <거울 속의 나>를 보는 것처럼 닮아서 머리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복제된 나를 보는 듯하여) 가슴으로 싫어서 밀어내게 된다.


# 난 엄마가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는 뭘까? 엄마는 딸을 사랑한다고 한다. "네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딸은 고개를 젓는다. "아니, 날 좋아해 달라"라고. 

보통 <좋아함; like>보다 <사랑; love>이 상위 개념이라고 생각하지만 딸 '크리스틴'의 생각은 다르다(대부분의 딸들이 다 그럴 것이다). 딸이 생각하는 <좋아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하고 수용해주는 것>이다. 좋아함의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 '크리스틴'은 친구 '줄리'에게 말한다. "너희 엄만 널 좋아하는 것 같아." 엄마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아이의 마음은 "척박한 사막" 같을 것이다. 나에게 하는 엄마의 애정 어린 몸짓과 말도 모두 삐뚤하게 보일 것이다. 딸은 17살 소녀이고, 딸이 이해하고 원하는 방식이 있다. 딸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을 처절하게 절규하고 있다. 당연히 엄마는 반론할 것이다. "내가 지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문제는 내가 원하는 사랑과 상대가 원하는 사랑의 방식이 다르다는 데 있다. 상대가 진정 원하는 사랑의 방식을 정확히 확인하고 그가 원하는 사랑의 표현을 해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 내 스타일의 방식을 끝까지 고수하는 사랑, 과연 그건 <사랑>이 맞는 걸까!


크리스틴, "나는 엄마가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


# 우리는 안다. 사랑하지만 결국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부모의 품을 떠나고 싶은 딸과 아직 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엄마     

영화의 결말은 엄마 '메리언'이 대학을 진학하는 딸을 뉴욕으로 떠나보내면서(끝까지 내 품에서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이별해야 하지 않겠냐는 딸의 말에 “아버지가 가실 거야.”하고 바쁜 듯 자리를 떠나 운전대를 잡고 펑펑 울었다. 딸이 떠나는 모습을 보면 봇물 터지듯이 감당 못할 것을 알기에 그 모습을 결코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딸을 보내고 남편의 품에 안겨서 펑펑 운다. 남편은 통곡하는 아내를 꼭 안아서 달랜다. 우리를 영원히 떠난 것이 아니고 또 돌아온다고.

너무 아름다운 순간,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난다. <크리스틴>은 그 순간을 엄마와 나누고 싶었다.


# I'M '크리스틴'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고향 새크라멘토를 떠나서 동경의 도시 뉴욕 상경에 성공한 '크리스틴'은 떠나보니 알게 된다. 그 지겨웠던 내 고향, 내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엄마였지만 가장 아름다운 찰나에 그리운 사람은 바로 <엄마>였음을. 가톨릭 여고를 다녔으나 신앙에 심드렁했던 그녀는 자기 발로 성당에 들어서며 깨닫는다. 지겨웠던 신앙도 <내 영혼의 토양>이었으며, 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큰 깨달음을 한(성인이 된) '크리스틴'은 드디어 스스로 "호(레이디 버드)"를 떼어 낸다. 네 이름은 뭐야? "내 이름은 '크리스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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