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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Sep 16. 2022

바투르산을 기어올라가던 날

등산은 못해먹겠네요


 새해 첫날도 아닌데 일출을 보러 가기로 했다. 어린이 2명, 어른 4명이 함께 하는 여행이다. 지금 발리는 코로나로 인해 투어 가격이 엉망이다. 인당 300-500K의 비용을 들여야 했던 바투르 등반은 우리 모두 다 합쳐 600K를 내는 걸로 합의를 봤다. 1년간 했던 모든 여행은 흥정과 에누리 그 자체라 재미있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숙소를 찾는데 근처에 그럴싸한 숙소는 이미 다 예약이 차있다. 국내 관광객이 어마어마하게 몰리던 르바란 (라마단이 끝난 걸 기념하는 명절) 기간이라 대부분의 숙소가 꽉 찼다. 바투르 산 근처 저렴하고 낡은 숙소를 찾아 "너 여기 가도 괜찮겠어? 난 괜찮아"를 서로 반복했다. 작은 언덕을 깎아 만든 숙소에서 우리는 3층 꼭대기에 나란히 서있는 방 세 개를 사용했다. 높은 돌계단을 3층까지 오르고 나면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모든 불편함을 상쇄하는 하늘이 바로 눈앞에 있다. 구름과 눈높이가 맞는 게 신기해 의자에 앉아 하늘 구경을 오랫동안 했다. 저기 멀리 구름 사이로 새떼가 난다. 새들이 줄지어 나는 게 선명하게 보여서 눈을 비볐다. 하나님 제가 지금 시력이 좋아진 건가요?


숙소에서 마주보는 하늘


 신나게 마셔보자며 와인을 4병이나 들고 왔는데  낡은 숙소엔 와인따개가 없다. 갑자기 친구가 운동화  빌려달라고 해서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와인을 따려다 말고 운동화를 빌려달라니. 곧이어 웃음이 터졌다. 운동화 입구에 와인병을 꽂아 벽에 퍽퍽 치니까 코르크 마개가 조금씩 올라오는  보였다. 와인이 먹고 싶어서 별거 다하는 사람들이다.


 밤하늘 별이 몇 개인지 세어볼 엄두조차 안 난다. 지금 이곳은 마치 우리만 있는 세상 같다. 별이랑 자꾸 눈이 마주치니 마음이 녹아서 속이야기도 술술 나온다. 와인잔이 없어서 레고 모양 어린이 물컵으로 잔을 부딪혀도 즐겁기만 하다. 새벽 3시에 기상해야 일출시간에 맞춰 정상에 도착할 수 있는데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간다.


 밤새 시끄럽던 풀벌레마저 조용한 새벽 시간, 바투르 등반을 위해 길을 나서는데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이 무섭다. 이렇게 캄캄한데 산길을 어떻게 오르려나 걱정스럽다. 사실 등산엔 영 소질이 없어서 이 여행을 망설였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이 산에 올라가 볼 일이 없을 것 같아 결국 제 발로 따라나섰으면서도 캄캄한 산길을 오르는 심정이 복잡하기만 하다. 등산로 입구에 도착해서 정상이 있는 곳을 올려다보니 저 멀리 산 한가운데 반딧불이 행렬 같은 등산객들의 랜턴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게 보인다. 랜턴이 백개쯤 모여있으니 산이 마냥 캄캄하지도 않다. 바투르 등산 투어 프로그램에서는 등산객 한 명과 산길을 이끌어주는 이 한 명이 동행한다. 나와 함께 산을 오른 건 14살 까덱이다. 마음으로 파이팅을 외치고 까덱을 따라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되돌아가고 싶다. 이 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등산로가 아니다. 커다란 바위를 곱게 갈아 쌓아 둔 언덕을 오르는 것처럼 발밑이 미끄럽다. 하필이면 밑창이 미끄러운 운동화를 신어서 한발 오르면 두발 밀려내려온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네발로 기었다. 우리 내려갈까 소리가 목구멍까지 찼는데 신바람이 나서 앞으로 뛰어가는 어린이와 나보다 더 속도가 처지는 친구사이에 껴있으니 괜히 힘 빠지게 할까 싶어 목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켰다. 이를 악물고 산길을 헤치며 올라간다. 바위를 찾아 밟고, 나무를 붙들고 때론 미끄러지면서 나보다 세 뼘쯤 작은 까덱에 의지해 꾸역꾸역 올라간다. 돌아갈까 소리를 백번쯤 참으니 어느새 절반 정도 왔다고 한다. 언덕에 서서 한숨 돌리는데 눈앞에 여명이 펼쳐졌다. 태어나서 이런 광경은 처음 봐서 괜히 울컥했다. 하늘에 달이 있는데 해가 슬그머니 올라오고 있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계속 게으름을 부리다가는 일출을 놓칠 수도 있으니 부지런히 다시 기어올라간다. 바투르산에 다녀온 친구들은 다들 청계산 정도의 난이도라 어렵지 않다고 했는데 이산에서 내려가면 꼭 따져 물어야지 마음먹었다. 까덱은 바위 가득한 비탈길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쉽게도 오른다.

"이 산에 자주 와요?"

"네."

"일주일에 몇 번쯤 와요?"

"매일 와요."

말을 잘못 이해한 줄 알고 두 번 물었다. 까덱은 별다른 보수를 받지 않고 배낭에 담아온 음료수를 관광객에게 팔아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 새벽 이 산을 오른다고 한다. 하필 이때 까덱의 낡은 신발 밑창이 떨어져서 반쯤 벌어져버렸다. 지금 이 아이가 얼마나 속상할지 짐작할 수도 없고 아는 체하기도 미안해서 애꿎은 생수만 두병 사서 들이켰다.


 이제 얼마나 더 가면 되는지를 다섯 번쯤 물었나. 목구멍에서 피맛이 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먼저 출발한 친구 가족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린이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2시간의 기어오르기 끝에 친구를 만나니 마치 이산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갑기 그지없다. 2시간 전에 헤어졌다가 만난 건데 천년만에 만나는 얼굴 같다. 모두 함께 무사히 올라왔다는 게 그저 기쁘기만 해서 부둥켜안고 싶은 심정이다. 산 정상 벤치에 앉아 새벽부터 함께 같은 길을 올라온 여행자들과 해가 뜨길 기다린다.  그런데 삼십 분을 기다려도 좀처럼 구름이 걷히질 않는다. 성미 급한 친구들은 벌써부터 내려가자고 성화다. 어지간해선 이런 순간에 고집을 부리지 않지만 오늘은 양보할 수 없다. 난 여기 두 번 다시 안 올 거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사정했다. 지루해하는 어린이들을 데리고 매점 뒤로 돌아가 수증기를 뿜어내는 돌도 구경했다. 어떤 외국인이 흐뭇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돌에서도 뜨거운 연기가 폴폴 올라온다. (그래서 그렇게 느긋한 표정이었구나.)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전히 구름이 시야를 가득 가리고 있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어 체념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 탄성이 들렸다. 구름이 걷히고 있다. 마치 하늘 왼편에서 거대한 누군가가 입바람을 후 불어주는 것처럼 구름이 점점 오른쪽으로 흐르고 있다. 연극 무대 막이 열리듯 물러서는 구름 뒤에서 연한 오렌지빛 태양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고 발아래엔 뿌연 안개구름 대신 하얀 구름이 선명하게 보인다. 함께 구름이 걷히길 기다렸던 사람들이 이제 셔터를 누르느라 바쁘다. 짧은 시간 구름이 말끔하게 걷히고 산아래 옹기종기 모인 지붕과 빽빽한 나무, 작은 언덕들이 보이니 그제야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이런 순간에 이런 광경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고 있다는 게 벅찬 감동이 되어 친구랑 눈만 마주쳐도 울컥한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네 시간 남짓인데 천년 동안 같이 고생한 사람들 같아 마음이 애틋해서 혼났다. 우리가 오늘 이 험한 길을 함께 올라왔으니 앞으로의 인생에서 고비를 만나더라도 이 감동 하나 붙잡고 함께 넘어갈 수 있을 거라는 작은 믿음 같은 게 생겼다.


올라가는 길은 기어서, 내려올 땐 굴러서 내려왔다. 발을 땅에 대면 인라인스케이트를 탄 사람처럼 자동으로 미끄러지는 바람에 웃기 싫은데도 저절로 웃으면서 내려왔다. 내 인생 최고의 일출로 기억될 만큼 멋지고 감동적이지만 아마도 두 번 다시없을 바투르 산행이 이렇게 무사히 끝났다.


달과 여명
일출
구름이 걷힌 뒤 산아래 풍경
뜨거운 수증기로 달걀을 삶아서 판매한다





Mt Batur

https://maps.app.goo.gl/nP4xT7HAKwoUkVGH8?g_st=ic


등산 후 온천에 가는 코스도 좋아요. 바투르 호수를 바라보는 인피티니 풀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 숙박을 하지 않아도 이용이 가능하며 보라색을 테마로 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입니다.

Toya Devasya

(0366) 51205

https://maps.app.goo.gl/AKKqevPxuLd1nof67?g_s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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