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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Sep 18. 2022

쌀국수 먹다가 만난 유럽 어른들

우리 사이의 거리를 사랑하는 법

 

 모처럼 술을 많이 마셨다. 조금 특별한 날이라 이른 오후부터 술자리가 시작됐다. 지난 5년간의 금주는 발리에서 다 무너졌다.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지만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이라 괜찮았는데 발리에서는 금주가 어렵다. 바닷가 노을 앞에서 빈땅을 마시지 않을 재간이 없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재밌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여기서는 당분간 금주를 포기하기로 했다.


 술을 잔뜩 마신 친구가 속이 확 풀리는 국물이 먹고 싶다고 해서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스미냑에 있는 베트남 식당에 가기로 했다. 내 생각에 Bo&Bun은 스미냑에서 쌀국수가 제일 맛있는 곳이다. 주문을 하고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있는데 옆자리 손 씻던 사람이 말을 걸어온다.

"우리가 칵테일을 사주고 싶은데 괜찮아요?"

"네?"

우리가 앉은 옆좌석에는 5명의 중년 혹은 노년의 사람들이 있었다. 화장실에서 말을 건넨 사람도 그중 하나다. 손 씻으러 간 사이 이미 이 두 테이블은 합의를 마치고 칵테일을 주문한 상태였다. 쌀국수가 나오기도 전에 칵테일이 먼저 나와서 다 함께 건배를 했다. 어림짐작으로 50대 혹은 60대인 이 5명의 친구들은 각각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한다. 그중 발리에서 식당과 리조트를 운영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어렵게 시간을 맞춰 2년 만에 모여 다 함께 발리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자리가 나란히 있으니 칵테일 한잔으로 끝날 리 없다. 계속해서 새로운 칵테일을 주문하고 건배를 했다. 로마에서 온 백발의 신사 (이렇게 말고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는 잘 다려진 검은색 긴 셔츠 소매를 반쯤 걷은 채 적당히 색이 바랜 청바지를 입고 멋진 플라멩코를 보여주었다. 꽤 오랜 시간 춤을 배웠다는 로마 어른의 깔끔한 동작이 멋있어 쌀국수가게 한복판에서 열심히 박수를 쳤다. 곱슬머리 아저씨는 이탈리아 특유의 제스처를 가르치느라 여념이 없다. 맛있을 땐 손가락을 모아 입에 대고 가벼운 키스를 한다. OMG은 맘마미아! 라 외치며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휘파람새처럼 휘이잉 하는 모양새로 손을 한 바퀴 돌리면 된다는데 그 모습이 귀여워서 열심히 따라 했다. 이탈리아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한다는 맘마미아 아저씨는 동글동글하고 컬이 굵은 곱슬머리에 배가 산타클로스만큼 나왔는데 손동작을 할 때마다 눈을 크게 뜨고 표정까지 과장되게 보여줘서 마치 유치원 선생님 같았다. 다섯 명이 모두 다른 나라 출신이라 어떻게 이 사람들이 친구가 된 건지 궁금했다. 이미 30년째 친구로 지내고 있고 처음엔 다 같은 나라에서 살다가 각자의 일을 찾다 보니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모처럼 시간을 맞춰 발리에 와서 짧은 여행을 함께 하고 있는 중이고 오늘은 우붓 위쪽으로 관광을 다녀왔는데 풍경이 너무 멋져서 좋았다며 우리에게도 발리에 왜 왔는지 물어본다. 우리는 여기 살고 있다고 하니 너무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다며 언젠가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도 와보기를 권유하고 자기 나라 자랑을 한다. 이 모든 친구들을 한데 모이게 한 사람은 조지 클루니와 크리스토퍼를 묘하게 반반 섞은듯한 미남 아저씨다. 발리에 산지 벌써 20년이 됐다고 하는데 짱구에서 꽤 크고 유명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곱슬머리 아저씨가 신나게 자랑을 한다. 이름만 들어도 단박에 알만큼 커다란 가게라 놀란 우리에게 별거 아니라며 손을 휘저어 친구를 말린다. 잘생긴 데다 겸손하기까지 한 이 미남 아저씨는 왁자지껄한 친구들 틈에서도 말없이 웃기만 한다. 오랜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흐뭇해 보였다. 저 미소를 보고 있자니 그 마음이 내게도 전달돼서 나도 이 사람들이 꼭 십년지기인 것만 같아 계속 웃게 된다. 각자 사업을 하고, 인생에 열중하느라 바빠 그렇잖아도 모이기가 어려운데 코로나까지 터졌으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할까. 이런 분위기에 한발 담그고 있는 게 오늘의 행운이다. 웃고 떠들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서 어느새 영업시간이 끝나간다. 내일 아침도 신나게 발리 투어를 떠날 거라는 아저씨들과도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충전을 맡긴 배터리를 찾으러 가는 척하며 친구들 몰래 계산을 하러 갔는데 직원이 날 보며 웃기만 한다. 영문을 몰라 계산대에 멀뚱하게 서있는데 이탈리아 아저씨가 다가왔다.

"너 지금 뭐해?"

"저 계산하려고요."

"오. 이거 두 번 계산할 거야? 그러면 이 가게 주인이 너무 기쁘겠는데?"

아! 계산하러 가는 걸 본 적도 없는데 어느 틈에 두 테이블을 다 계산한 걸까. 누군가 대신 계산을 해주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그런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을 만큼 이 과정이 자연스럽고 부드러워서 나도 나중에 꼭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늘 우리와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서 반갑고 고마웠어. 발리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언젠가 또 만나면 좋겠다."

  두 시간을 머리가 하얀 아저씨들이랑 웃고 떠들었는데 같이 보낸 시간이 마냥 자연스럽고 즐겁기만 했다. 헤어지는 인사마저 다정하고 따뜻하니 오늘 나는 '어른들의 여유' 한 자락 마음 깊이 배워간다.


아저씨들은 이렇게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우리 다음에 또 만나자.' 하며 기약 없이 헤어지겠지. 그리고는 여행을 마치고 또 각자의 나라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별이 늘 초조했다. 친구들이 유학을 가거나 이민을 가면 당분간 볼 수 없는 시간이 아쉬워 헤어질 때마다 엉엉 울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삶에서 여유를 부리는 방법을 조금쯤 알고 있다. 지금 나는 발리에 와있고 매일 붙어 다니던 단짝 친구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마음을 나누던 가족 같은 친구들은 호주에 살고 있다. 얼굴을 못 본 지 벌써 3년째에 접어들지만 그들은 여전히 내 단짝 친구고 마음을 나누는 가족이다. 지금 우리가 계속 한 공간에서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각자의 삶을 살다 어느 날 같은 마음으로 서로에게 닿을 날이 분명히 온다. 나는 이제 멀리 있는 친구와 나 사이에 놓인 물리적 거리와 깊은 그리움마저 사랑하는 법을 연습하며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기쁘게 기다리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집에 도착해 씻고 누운 다음에도 쌀국수 가게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다시 곱씹으며 낄낄거렸다. 웃느라 정신이 없어서 이름마저 다 잊었지만 즐거운 에피소드를 만들어준 유쾌한 유럽 어른 친구들의 발리 여행도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멋있는 사람들, 플라멩코를 추는 로마 사람,맛있는 쌀국수











스미냑에서 쌀국수 먹고 싶을 땐 보앤번으로 달려갑니다. 11시까지 영업하니 술 마시다 2차로 가기도 좋아요.

https://g.page/BoandBun?share


스미냑 빈땅 마트 맞은편에 새로 생긴 베트남 식당. 늦게 가면 재료가 떨어져서 먹고 싶은 메뉴를 주문 못할 때도 있어요.

https://goo.gl/maps/bwbj2Qdn8divshdH9


르기안에서 제일 맛있는 태국 음식점입니다. 거의 모든 메뉴가 맛있어요.

https://goo.gl/maps/pm5N23ua6Zq3LqH96


짱구 쌀국수 맛집. 근데 저염식 사람에게는 추천하지 않아요. 친구가 "바닷물로 끓인 건가?"라고 했거든요.

https://goo.gl/maps/NxDgM3jq7YpeqiF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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