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하시고, 쏘세요!
준비가 늘어지는 것 같을 때마다 머리 한구석에는 “하지 않으면 안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라는 생각이 나를 채찍질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완성은 환상에 불과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벌어지지 않는다. 실패하면 개선할 수라도 있다.
해서, 스스로가 생각하던 마지노선이 준비되었다면 실행을 통해 개선해 나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자기 객관화나 시장조사 없는 막연한 지원은 당연히 개인적인 만족이지만, 상황 판단 후 어느 정도 가능성 있는 곳에 배팅하는 것이라면 최소한의 반응이 있을 것이다. 수정 및 개선은 그때부터 하면 된다. 이 또한 하나의 User-centered design (Iteration)이다.
Nomad List — 리빙코스트를 비교할 수 있는 재미있는 사이트
나라를 옮기는 것은 쉽지 않고, 때문에 이직 후 정착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해서 다음의 사항을 고려하여 지역 후보군을 정해두고 지원하는 것을 추천한다.
생활비 (월세)
연봉 풀 (+세금) — 한국처럼 직전 연봉이 큰 요인은 아니다. 인터네셔널을 고용할 때, 나라와 지역마다 상황이 다름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해당 지역의 리빙코스트와 셀러리 레인지, 카운터 오퍼를 할 수 있는 다른 회사의 오퍼다.
이직 풀 (해당 산업군이 해당 지역에 많이 있는지)
이민 난이도 (영주권 획득 난이도, 언어, 인종 다양성 등)
나는 링크드인에서 미국, 캐나다와 독일 베를린 혹은 인터내셔널 게임 회사를 중심으로 지원했다. 당연히 미국도 궁금했지만 비자 따기가 너무 어려우므로 이력서를 쓰긴 하되 기대는 없었다. 싱가포르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큰 게임 회사가 별로 없었고, 뉴질랜드는 잘 몰랐다. 왜인지 호주는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게임 회사가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인상 때문이었다.
지역보다는 회사나 프로젝트에 무게를 뒀다. 국제적인 인지도가 있고, 배울만한 점이 있어 그다음 커리어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했다. 진작에 해외 이직 후 잘 적응하며 일하고 있던 H 언니는, 오히려 대기업일수록 경험이 있어 인터내셔널 지원자에 유하다고 했다.
1n 군데 정도를 지원했고, 서류가 통과한 곳은 국내 2, 넥슨 자회사였던 스웨덴 1, 콜드메일이 왔던 아부다비, 캐나다 1 이렇게 네 군데였다. 레퍼럴이 있으면 확실히 서류 단계에서 통과할 때 도움이 되지만, 당연하게도 함께 일했던 것이 아니라면 주요 요인은 아니다.
회사들은 지원자가 마음에 들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하는 것 같다. 반대로 응답이 느려지면 기대를 내려야 한다. 회사 입장에서는 최대한 많은 패를 들고 싶어 하기 때문에 우선순위의 지원자가 아니더라도 느리게 답변을 준다. 따라서 담당 리쿠르터의 회신을 기다리지 말고 늘어지는 것 같으면 주도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좋다.
다만 7~9월 휴가 기간과 12~1월 연휴 기간은 예외인데, 리쿠르터나 인터뷰어들의 휴가에 따라 1~2주 밀리는 것은 흔하다. 따라서 이 시기에 회사의 반응이 긍정적이라면 리쿠르터에게 구체적인 스케쥴을 물어보자.
일반적으로 웨스턴 회사들은 다음과 같은 절차를 거친다. 한국 회사와 비슷하면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물론 웨스턴 회사들 끼리도 세세한 부분은 차이가 있었다.
리쿠르터와의 전화 인터뷰 (phone call interview)
하이어링 매니저와의 인터뷰 (Hiring manager interview)
과제 (Assignment) — 최근에는 하지 않는 추세라고 들었다.
팀 인터뷰 (Panel interview, 코로나 전 대면 인터뷰 Onsite interview)
오퍼 안내 (Offer presentation)
한국에는 일반적으로는 없는 단계다. (국내 UX 및 외국계 인재 채용으로 유명한 C 회사엔 있었다) 이 단계가 있는 이유는 팀에서 직접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전부 다 훑고 스크리닝을 하기에는 양이 많아서가 아닐까 추측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북미의 다국적 대기업 같은 경우 세계 각지에서 지원서가 쏟아지기 때문에, AI를 통해 자동응답 메일을 회신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력서가 자동 분류 시스템에서 걸릴 수 있는 단어”를 넣는 것이 팁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실제로 미국 게임사에서는 자동 응답으로 보이는 거절 메일을 받았다. (비자 지원 여부에서 걸렸지 싶다)
이 단계에서는 리쿠르터가 이력서를 바탕으로 지원자를 골라낸 뒤, 팀에게 전달받은 자격 요건을 구두로 자세히 체크한다. 예를 들어 UX 디자이너의 경우, 사용하는 툴은 무엇인지, 게임 엔진에 대한 경험이 있는지, 어떤 업무를 해왔는지 등이다. 팀이 찾는 요건과 어느 정도 일치하고 지원자가 좋은 인상을 준다면 인터뷰 말미에 자연스럽게 다음 스테이지에 대한 안내를 해준다.
채용 과정 전반에 적극적으로 리쿠르터와 소통하는 것이 좋다. 특히 해외 이직이 처음이라면 모든 과정이 낯설 것이므로, 전체 인터뷰 프로세스는 무엇이 있고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라운드별 어떤 것을 준비하면 좋을지를 물어보자. 채용 여부가 리쿠르터의 실적이므로 질문하는 것이 지원자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줄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마찬가지로 만약 채용 과정 도중 떨어졌다면, 부담 없이 왜 떨어졌는지 이유를 리쿠르터에게 물어봐도 전혀 문제없다. 보통은 어떤 점이 아쉽다든지, 내부 지원자가 뽑혀버렸다든지 등 명확하게 이유를 알려준다. 다만 추측건대, 어느 정도 기준에는 부합하나 비자 등 신분 문제거나 내정자가 있었다면 따로 답신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럴 때는 정신 승리를 하면 된다.
한국에서는 지원자의 이력서가 마음에 들면 보통 실무진 면접을 진행한다. 혹은 과제를 사전에 내주고 작업물과 함께 면접을 보기도 한다. 이와 다르게 해외 기업과 채용 프로세스를 진행했을 땐, 리쿠르터와의 인터뷰를 통과한 뒤 하이어링 매니저도 지원자의 이력이 마음에 들 경우 면접을 진행했다. 하이어링 매니저란, 고용담당자, 즉 팀의 리더이고 회사에 합격할 경우 함께 일할 상위 직급자이다.
첫 해외 이직을 했던 회사도 과제를 사전에 내주긴 했지만, 통과 후에 리더쉽 인터뷰를 봤다. 모바일과 PC 팀 UX 리더 두 명과 스튜디오 리더쉽 관리자였으니 사실상 하이어링 매니저와의 인터뷰인 셈이다.
다만 몬트리올에서 이후 이직을 위한 인터뷰를 봤었을 땐, 변형 기출로 리쿠르터와의 인터뷰를 보지 않고 하이어링 매니저 인터뷰부터 봤던 적이 있었다. EA 유일의 재택 스튜디오였기 때문에 전세계에서 지원받았고, 지원자가 1주일에 300명 정도였으며, 리더가 빠르게 처리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달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단계에서는 보통 과거 이력을 소개하고, 어떤 식으로 일했으며, 어떤 이유로 이직을 원하는지 등을 이야기한다. 현재 실무에 필요한 스킬 셋을 갖추고 있는지, 팀에 잘 적응할지, 일감을 주었을 때 어떤 식으로 일할지 예상되는지 등을 판단하는 자리이니 관련해서 질문과 답변을 나누면 된다.
물론 지원자 입장에서도 저 사람이 함께 일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은지, 괜찮은 사람인지 판단해야 한다. 입사 후 팀에 대한 인상을 결정하며 나를 평가할 직속상관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하지 않는 추세라고 들었다. 이직을 위한 인터뷰에서는 딱히 과제 스테이지가 없었다. 팀 내 과거 함께 일했던 동료가 나를 추천했거나, 과제를 대체할 만큼 인지도 있는 회사/프로젝트에서 오래 근무했다면 이 단계를 생략하는 것도 같다.
한국에서 바로 해외로 이직을 시도할 때, 삼성이나 LG 정도가 아니면 아무리 큰 회사라도 인지도가 없는 듯하다. 나름 한국에서 큰 게임 회사인 넥슨을 다니고 있었고, 입사 후 몇 명의 동료가 회사를 알고 있었지만, 인터뷰이들은 보통 잘 몰랐다. 네이버조차 미국 회사와의 인터뷰에서는 잘 몰라 K-구글이라고 설명하셨다는 이야기를 전 네이버 직원분께 들었다.
그 말인 즉슨 검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워낙 인터넷에 남의 작업물을 활용해 사칭하는 경우도 있고 하니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그만큼 채용 프로세스에서 핵심이고, 반응이 좋다면 이후 인터뷰는 수월하다. 물론 지원자 입장에서 부담이 되고 피곤한 것은 사실이므로, 과제비를 주면 좋겠다는 소소한 희망이 있다. (하지만 초년생쯤 면접을 봤던 컴투스만 유일하게 과제비를 주었다)
과제의 경우 게임 UX라 하더라도 일반 UX와 보는 부분은 비슷하다. 주제와 조건을 전달하고 문제 풀이 과정과 논리를 본다. 일반적으로 시간은 최대 일주일 정도며, 목업의 퀄리티보다 어떻게 문제 풀이를 하는지, 논리적인 설득력이 있는지 위주로 보니 너무 올인하지 말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나는 서류 단계를 넘어가는 것조차 어려운 인터내셔널 지원자였으므로 모든 기회가 간절했다. 퇴근 후 수면 시간을 줄여가며 일주일을 통으로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런 만큼 떨어졌을 땐 심리적인 타격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리쿠르터에게 이유를 물어보고 다음 기회에 보완하려고 노력했다.
같이 일할 사람들과 앞으로 어떻게 협업할지 서로 간을 보는 단계라 할 수 있다. 다니던 회사와는 딱히 보지 않았지만, 몬트리올 내에서 이직하기 위해 봤던 세 군데의 스튜디오는 모두 팀 인터뷰를 봤다.
EA의 경우 두 군데 모두 Panel interview라는 이름으로 모든 협업부서와 인터뷰를 봤다. 보통 UX 디자이너 동료, UI 프로그래머, 프로덕션 매니저 혹은 프로듀서 이렇게 세 부서의 실무자들과 인터뷰를 보는 것 같다.
미래에 함께 일할 동료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 협업 스타일을 어필하는 자리이므로, 각 부서별 중요하게 보는 것들을 짐작해 대답하면 된다. UX 디자이너 실무자들과는 관련 지식과 과거 업무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등을, UI 프로그래머들과는 스트럭쳐 관련 최적화나 협업 시 코딩 관련 유연함 등을, PM과는 우선순위 파악 및 상황이 여의찮을 때 의사결정 등을 볼 것이다. 물론, 하이어링 매니저 인터뷰와 마찬가지로 왜 이직하는가도 물어보니 일관성을 가지고 주관을 담아 답변하는 것을 추천한다.
또한 지원자 입장에서 회사의 분위기를 판단내릴 수 있는 또다른 기회이다. 개인적으로 각 단계마다 “지금까지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팀의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를 인터뷰 말미에 물어봤는데, 대체로 공통 언급되는 부분을 통해 팀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들었던 것은 “사람이 좋다, 소셜 버블이 형성되어 있다” 혹은 “효율적으로, 원하는 목표를 다함께 이루고자 한다” 등이었다.
글래스도어 등을 통해 대략적인 레인지를 참고할 수 있다
이후 모든 것이 잘 풀려 오퍼를 받으면, 담당 리쿠르터가 직급과 연봉, 회사의 베네핏이나 비자 관련 안내를 하기 위해 오퍼 안내 인터뷰를 잡는다. 보통 오퍼 안내 인터뷰 후 협상 및 수락까지 약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지는데, 만약 동시에 다른 회사들과 채용 프로세스를 진행 중이라면 대략의 타임라인을 공유하고 시간 연장을 요청할 수 있다. 너무 늘어지면 회사 입장에서도 차순위의 지원자를 고려하므로, 상황에 맞춰 결정하면 된다.
이때 연봉이나 휴가 등 베네핏 협상을 할 수 있으므로, 다른 회사의 오퍼가 있다면 이를 기준으로 카운터 오퍼를 시도하자. 사실 순혈 토종 한국 직장인으로서 이 네고 문화가 낯설고 어렵다는 걸 안다. (아직도 어렵다) 하지만! 생각보다 유러피안이나 북미인들은 막 지른다. “해서 안 되면 말고 되면 너무 좋고”의 마인드이다. 그러니 아시안으로서 자신감을 가지자. 아무리 우리가 나대봤자 그들의 한 수 아래다.
한국에서 바로 해외 이직을 할 경우에는, 세전 연봉이 높더라도 꼭 꼼꼼하게 글래스도어 등을 통한 회사의 직급별 평균 연봉, 해당 지역의 세후 금액, 리빙코스트(특히 월세)를 계산해 보고 실제 손에 남을 돈을 따져보는 것을 추천한다.
인고의 시간과 우여곡절을 거쳐 여기까지 도달한 당신, 너무나 축하한다.
근무할 회사에 대한 인상과 프로젝트, 오퍼가 마음에 들어 수락했다면, 믿기지 않겠지만 새로운 장소에서의 근무가 곧 시작될 것이다. 물론 왜인지 아득하고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안다.
이다음은 해외 취업의 꽃인 비자와, 해외 이직 시 받게 될 리로케이션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다만 캐나다 퀘벡에만 경험이 있어 관련한 정보만 있음을 감안해 주길 바란다.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해 작성된 글입니다. 관련해 여러 가지 의견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