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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호 Jul 30. 2024

하루살이

구매목록: 일회용카메라, 필름 사진 인화 비용

27/27 

어렴풋이 눈을 떴다. 낯선 사람들이 나를 응시한다. 눈을 맞추자 흐릿한 얼굴들이 점차 선명해진다. 사람들 뒤로 푸른 나무들의 잎이 무성하다. 여긴 어디지? 숲인가? 그러기엔 테이블 위엔 커피 5잔과 잔디 밭 위엔 의자가 놓여있다. 찰칵! 카메라 셔터 숫자는 26을 가리켰다. 


20/27 

그들은 나를 저렴한 값에 고용했다. 나는 일회용품 출신이지만 열심히 일했다. TV에선 신문지도, 고철도, 유리병도, 페트병도 모두 각자의 역할과 쓸모가 있으며 일회용품 역시 재활용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내 역할만 잘 해낸다면 나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라 믿었다. 


10/27 

“몇 컷 남았어?” “딱 10컷 남았다.” “얼마 안 남았네” “필름 다 쓰면 카메라 다시 쓸 수 있나?” “이건 일회용품이라 못 쓰지. 쓰던 건 버리고 새걸로 바꿔야지” “그냥 정기적으로 쓸 좋은 카메라를 사는 건 어때?” “에이.. 비싸잖아. 어차피 일회용은 싼 맛에 쓰는 거지 뭐.” 


1/27 

마지막 컷만을 남겨두자 나는 그동안 잘 해냈을까, 그들을 만족시켰을까, 하고 싶은 일을 더 할 수 있을까 불안했다. 나는 그들의 마지막 사진을 촬영했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의 밝은 표정은 나와는 다른 세계 같았다. 내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졌다. 전원이 꺼져가는 걸까 더 이상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며칠 후 

“안녕하세요. 사진 인화하려고요.” 

“네. 필름 주세요.” 

남자는 일회용 카메라를 건넸다. 

“일회용 카메라인가요?” 

“네 맞아요.” 

“사장님 혹시 필름 새걸로 바꾸면 이 카메라 더 쓸 수 있나요?” 

“아니요. 일회용 카메라는 더 못 써요. 한 번 쓰면 폐기해야 됩니다.”

“아 그렇구나. 아깝지만 어쩔 수 없죠 뭐.” 


본능적으로 오늘이 마지막임을 알아챘다. 무기력한 체념 속에서 다음 생은 하루살이가 아니기를 희망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끝없는 불황에 긴축 시대가 됐다. 오늘도 구조조정 소식이 들려온다. 일회용 카메라를 구입하며 스치던 생각으로 어쩌면 나도 일회용 카메라와 비슷한 처지가 되진 않을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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