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라 Apr 03. 2020

#0. 프롤로그

자전거로 여행을 떠나보자!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기억들 중 하나를 꼽자면, 2011년 여름에 친구와 함께 훌쩍 떠났던 지리산 1박 3일 종주가 생각납니다. 한번 가보지 않겠냐는 친구의 제안에 별 고민도 없이 며칠 만에 대충 짐을 꾸려 훌쩍 떠났던 지리산 여행. 전라도에서 올라가 경상도로 내려오는 3일의 대장정을 마치고 서울의 하숙방으로 돌아온 뒤, 기절하듯 자고 일어나니 불과 어제까지의 여행이 마치 꿈만 같았습니다. 그때 찍었던 사진을 다시 찾아보지 않으면 책상에 엎어진 실험실 알코올처럼 금방 날아갈 것만 같았던, 제게는 그런 믿기지 않는 경험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시 아버지께 빌렸던 비싼 등산화의 밑창이 다 망가져서 너덜너덜해졌습니다.


  이전에 근무하던 회사의 계약이 작년 11월로 만료되고, 프리랜서로서 이런저런 일들을 의뢰받아 처리하던 도중 코로나 19 사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원래 회사 계약 종료 후에는 안정적인 수입이 없더라도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며 여유롭게 20대의 마지막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전염병 때문에 마음껏 뭔가를 하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수입마저 끊긴 것은 덤입니다... 하하...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 다녀오려고 몇 달 전부터 준비했던 해외여행도 아예 불가능한 선택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항공사에서 전액 환불조치를 해줘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이대로는 일상이 지겨워 미쳐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도저히 좀이 쑤셔 견딜 수 없던 어느 저녁,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20대의 마지막, 1년 뒤면 30대가 되어버리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20대의 마지막 에너지를 어떤 방법으로 기억에 남길 수 있을지... 그러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여행입니다. 하지만, 남들처럼 어디 들러서 맛있는 걸 먹고 관광지를 둘러보는 무난한 여행은 너무 뻔하고 재미가 없겠죠? 여기서 저의 재미난 발상이 떠올랐습니다.


한국을 차 없이 여행하자


차가 없던 옛날에는 이렇게 걸어 다녔습니다.


  되돌아보면, 저는 언제부턴가 흥미진진한 모험을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남들처럼 기차나 비행기, 또는 차로 가는 여행보다는 두 발로 직접 가는 여행을 늘 원했습니다.

  사실 아주 예전부터, 정확히는 수능을 마친 뒤부터 '20대가 가기 전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보자'는 생각을 줄곧 해왔습니다. 평소 차로만 다니며 놓쳤던 한국의 길들을 천천히 눈으로 보며 만끽하고 싶었습니다. 다만,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여유가 없어 계속 미루고 있었을 뿐입니다. 자전거길 기준으로 인천 기점에서 부산 종점까지는 약 600km에 가까우니, 차 없이 다녀오려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언제나 큰 법입니다. 다른 것들을 제외하더라도, 오로지 두 발로만 국토를 누비는 것은 시간적으로 너무나 손해가 큽니다. 어느덧 30을 바라보는 지금, 변변한 벌이도 없이 20대의 마지막 영혼과 시간을 모조리 여행에만 쏟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저는 두 발로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전거'를 택하기로 했습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자전거라는 수단을 택한 이유는 매우 간단했습니다. 걸어서 부산까지 간다면 대략 하루에 40km를 걷는다고 생각하고, 직접 집에서 20km에 달하는 거리를 하루 만에 왕복으로 걸어봤기 때문입니다.


더닝 크루거 효과를 몸소 증명했습니다. 무식할수록 용감한 법입니다.


  실제로 가방에 약 10kg 이상의 짐(2L 생수 5병)을 무식하게 쑤셔 넣고 서울 남단에서 성남시청까지 왕복으로 걸어봤더니 약 60,000보와 40km 정도가 소요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며칠 동안 제대로 걷기도 힘들 정도로 허리 아래로는 모조리 아프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조선시대의 선비들도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나귀 정도는 타지 않았을까 하는 나름의 자기 합리화 과정을 거친 후, 이동수단은 주저 없이 자전거로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로 다음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바로 자전거를 고르는 것입니다. 저렴한 자전거는 긴 여행 일정을 견디기 힘들지만, 비싼 자전거는 제 지갑 사정이 허락을 하지 않습니다. 저렴한 자전거는 자주 고장이 날 것 같았고, 비싼 자전거는 여행 중에 한 번의 잔고장에도 큰 금액이 깨질 것 같아 걱정이 앞섰습니다.


이런 상황은 결코 원치 않습니다.


  최대한 튼튼하면서도 저의 지갑 사정을 곤란하게 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멋진 자전거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평생 타본 자전거라곤 어릴 때 타던 유사 MTB와 따릉이 같은 아줌마 자전거밖에 없던 저는 며칠 정도 자전거의 소재와 부품, 브랜드 등의 지식 등을 공부했습니다.


  며칠을 공부한 효과가 있던 모양인지, 성능과 디자인 모두를 만족하는 자전거를 찾아냈습니다. 그 녀석은 바로 미국의 자전거 회사인 스페셜라이즈드(Specialized)의 시러스 2020(Sirrus 2020) 모델이었습니다. 튼튼하면서도 비교적 가벼운 무게일 수 있게 해주는 알루미늄 소재, 가성비 좋은 기어, 무엇보다도 안장이 기본적으로 좋은 것으로 장착되어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본 사진은 참고용으로, 디자인만 같습니다. 위 자전거는 200만 원이 훌쩍 넘습니다...


  이제 자전거를 사기만 하면 끝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또다시 발생했습니다. 코로나 19의 여파로 인해 중국의 공장이 가동을 멈추면서, 해당 제품을 취급하는 자전거 샵들이 전부 재고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 10만 원이 넘어가는 물건들은 직접 보고 구매해야 한다는 이상한 고집(?)이 있어서, 따릉이를 타고 온 서울의 자전거 샵을 헤집고 다녔지만 제가 원하는 자전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여행 계획은 자전거를 사는 것부터 무너지나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자전거를 사기는 싫었습니다. 왜, 그런 것 있잖아요? 눈에 한 번 들어온 물건이 있으면 다른 물건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 이미 저는 시러스 2020에 콩깍지가 씌고 만 것입니다.


  허무한 기분에 매일을 따릉이로 달래 보며 한강을 누볐지만, 따릉이를 타면 탈수록 지금의 상황을 피하려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점점 처음의 결심이 흐려져서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따릉이를 타고 돌아온 어느 날, 문득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전화를 걸었던 번호의 주인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낯익은 목소리를 내었고, 이윽고 저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며칠 전 들렀던 자전거 샵의 주인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전해주시는 반가운 소식이 저의 여행의 신호탄을 쐈습니다.


찾으시던 자전거 말인데요, 재고를 확보했습니다.


 - 다음에 계속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