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남자 친구가 내게 물어봤다. 그리고 그는 한 마디 더 보태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싱가포르로 옮기면 안 돼?
너네 회사 싱가포르엔 지사 안 낸데?"
"여기 오래 살 곳은 아닌 거 같아.."
이제 막 인도네시아 생활 5개월 차로 들어선 나와 어느덧 나를 따라 덴마크에서 인도네시아로 넘어온 지 2개월 된 남자 친구는 어느덧 잘 적응하는가 싶다가도 분노가 치밀어 올라 순간 이 도시 자체가 싫다며 불같이 화를 내곤 한다. 특히나 교통체증 지옥의 도시로 알려진 이곳에서 시간대를 잘못 맞추는 날엔 끔찍하고 소름 돋을 만큼 길 한가운데 갇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날엔 괜한 분풀이로 서로에게 화를 내게 된다. 여자 친구 하나 보고 난생처음 동남아시아에 온 남자 친구는 처음에는 어디든 괜찮다며 아프리카 오지라도 따라가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슬금슬금 발을 빼는 모습을 종종 비춘다.
대체 왜 인도네시아어야 했는지, 대체 왜 발리도 아니고 자카르타여야만 했는지 말이다. 처음 인도네시아에 오기 전, 분명 나는 경고를 했었다. 이곳은 '인도'가 없어서 걸어 다닐 곳도 없고 그 흔한 공원 하나도 없다고. 쇼핑몰 천국이고 길거리에 레스토랑 찾기도 힘들다고.
"아니 글쎄, 내가 아는 대표님이 그러셨는데 한 스웨덴 개발자가 인도네시아에서 일하려고 왔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가 나고 적응하기 힘들어서 떠났대.."
이 말을 들은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약해빠진 유럽인이라 그래.
나는 강한 유러피안이야"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그가 도착하자마자 무너지기 시작했다.
1. 연약해지는 마법
원래 감기도 잘 안 걸리는 사람이 신기하게 인도네시아 온 다음날 바로 구토에, 하루 종일 설사에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A형 간염인가? 뭐 뎅기열? 말라리아? 그것도 자카르타에서?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병원을 가야 하나 싶었는데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또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그를 보면서 그저 여행자병에 잠시 걸렸구나 생각했다. 흔히 말하는 물갈이라고 생각했지만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배탈이 나고 고열이 나는 그를 보면서 안쓰럽다고 생각이 들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는 공기질이 한국만큼 아니, 한국보다 나쁘고 오토바이가 많다 보니 매연으로 가득 차 있다. 그뿐만 아니라 수질이 너무나도 나빠서 (인도가 더 깨끗할 듯하다) 나 또 한 피부가 오자마자 망가지기 시작했다. 청정지역 라트비아와 덴마크, 독일, 스웨덴에서만 살아본 남자 친구는 한국에 와서도 한국이 더럽다고 했었다. 그런 그에게 인도네시아는 과연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그리고 그에겐 물리칠 수 없는 많은 박테리아가 존재하는 이곳에서 그는 매주 한 번씩 원인 모를 통증을 얻게 되었다.
2. 걷는 법을 잊어버릴 수도
살다 살다 이렇게 보행자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없는 도시는 처음 와 보았다. 인도에 살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자카르타는 정말로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는 도로가 부족하다. 아니 거의 없다고 보면 될 정도다. 그렇다 보니 매번 택시나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편하면서도 굉장히 갑갑하단 느낌을 받게 된다. 이곳에 오기 전에 왜 대체 자카르타 여행책은 없을까? 하며 의문을 가졌었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걸어 다닐 곳도 볼 곳도 심지어 갈 곳도 정말 마땅하지 않다는 것을.
(안전하게 또는 제대로) 걷고 싶으면 쇼핑몰에 가야 한다. 대형 쇼핑몰에 가서 몇 바퀴씩 걷다 오곤 한다. 또는 실내 헬스장을 가거나 하는 수밖에 없다. 매주 일요일마다 Car free day가 있지만 그것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공간일 뿐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
여담이지만 얼마 전에 싱가포르에 가게 되었는데 정말 나와 남자 친구는 원 없이 걷고 또 걷다 왔다. 그게 바로 우리의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생각 없이 안전하게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3. 이해가지 않는 물가
동남아시아라서 저렴할 거라는 생각은 당장 치워야 하는 곳이 바로 '자카르타'
자카르타는 중간 가격의 식당이 없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싶겠지만 정말로 그렇다. 이곳은 빈부격차가 상당할 뿐만 아니라 그 '중간'가격의 식당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아예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 천 원주고 먹기와 또는 쇼핑몰에 가서 최소 길이만 원 지불하고 먹기 이 둘 중에서 늘 선택해야 하는 사항이다. 쇼핑몰에 가면 그렇게 좋은 곳도 아닌 것 같은데 한 끼에 최소 만원은 써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음료 따로, 식사량 자체가 적다 보니 메뉴 하나를 시켜도 한국인 일반 성인이 먹는 양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장염을 방지하기 위해 길거리 음식과 로컬 음식을 못 먹는 이들에겐, 어쩔 수 없이 매 끼니마다 최소 만원은 줘야 한다는 의미이다.
인도에서 살 때는 일반 로컬들이 가는 식당들이 참 많았다. 그래서 저렴하고 맛있게 딱히 위생에 문제없을 정도로 먹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베트남도, 태국도 그랬다)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왠지 모르게 위생 관리가 안되어 있고, 제대로 된 야시장도 없다.
어느 정도로 물가를 체험하냐면 싱가포르에 갔는데 그 비싸다는 싱가포르에서 크게 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였다. 싱가포르는 푸드센터들이 잘 되어있고, 한 끼 식사로 7-8천 원으로 배부르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인도네시아는 물가가 저렴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그렇다고 생활물가 저렴하지도 않다.
마트에서 장을 보면 사실 한국과 별다르지 않다고 생각이 드는데 일단은 유제품이 한국만큼 또는 한국보다 비싸고 수입품들이 너무나도 비싸기 때문이다. 물론 동남아시아다 보니 과일을 저렴한 편에 속하지만 채소도 결코 저렴하지 않다. 특히 파프리카 너무 비싸서 먹고 싶어도 돈이 아까워서 집었다 놓기를 반복한다. 우유와 치즈 그리고 버터가 너무 비싸서 남자 친구는 아예 유제품을 끊었다.
(개인적으로 인도네시아 우유는 맛도 없다)
4.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개발도상국 어디를 가던 그래도 정당한 지불 또는 합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만큼인 장소에 가면 그만큼의 수준 높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근데 인도네시아는 아니다.
말 그대로'답답하다'라는 말이 하루에 수십 번씩 나올 지경이다.
전망 좋은 레스토랑을 몇 주전 예약해서 갔더니 예약 리스트에 없다고 하거나 요청한 물건이 있다고 해서 갔더니 알고 보니 없거나 다 될 거라고 하더니 하나도 안 되는 그런 빈틈들이 너무나도 많다. 정말 화가 종종 나곤 하는데 이제는 그냥 포기 수준에 일렀다. 애초 기대를 접기 시작했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만 비추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저 수준 높은 무언가, 아니 일반적으로 한국 또는 유럽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며 살고 있다.
물론 좋은 점들도 참 많이 발견했고 좋은 사람들도 만났다. 싱가포르에 여행 갔을 땐 오히려 인도네시아가 그리울 정도였으니 그새 정도 들었고 말이다. 다만 확실한 건, 이 도시는 분명 '거주자'를 위한 도시는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곳에서 거주할 의향이 없어진 것은 분명하다. 매력이 없다기보단 너무나도 벅차서 가득 차서 힘든 그런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