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관에 들어가다

by 김훈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 지도자급의 성찰까지는 아닐지라도 나는 죽음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허무’라는 단어로 마무리한 하루를 반성하며 수만 가지 다짐과 함께 시작한 아침도, 진흙에 끼어버린 타이어처럼 여전히 그 허무의 공간을 벗어나지 못했다. 다짐과 괴로움을 반복함에도 달라지지 않았던 지리멸렬한 무수한 날들에 대한 무감각이 감각 속을 채워갔다. 무언가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었지만 달라지지 않는 삶에 열정을 갖기란, 나를 적대시하는 부하직원에게 일을 가르치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애정을 가지려야 가질 수 없었다. 삶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유리 위를 걷는 아슬아슬한 삶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청천벽력 같은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일을 하다가 쓰러지셨다는 말을 들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뭐? 진짜? 거짓말하지 마”가 전부였다. 카운터 펀치를 맞은 권투선수처럼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심호흡에 이상을 느끼고 쓰러진 뒤 두 번의 제세동기를 사용하고도 깨어나지 않았던 나의 창조자는 거룩한 응급대원의 불굴의 의지로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그 눈물은 슬픔이고 놀람이었으며 안도의 눈물이었다.


그때부터 시간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영원히 살 것처럼 시간을 대했다. 회사에 조금 미안해하면 되는 것인데, 휴가를 취소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주말에는 시답지 않은 인간관계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을 뒤로 미뤘다. 나중에 그리고 더 나중에, 어느 누구도 미래의 순간까지 살거라 보장한 적 없음에도, 어리석은 중생은 그때 누려야 할 시간을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저당 잡혔다. 시간의 영역은 관계에 확장된다. 우리에게 시간이 많다고 생각할수록, 관계에 소홀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당시에 가족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나는 한국에서의 삶에 진저리 쳤다. 그래서 외국에서 살기로 했다. 반면 부모님은 외국으로 떠나는 것에 대해 완강하게 반대했고, 나는 그 반대에 다시 분노했다. 부모님은 사랑이란 인질로 나에게 간섭했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상대를 바꾸려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의 오류를 지적하고 비난했다. 얼마간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고, 삼킨 모래가 가슴에 쌓이며 매일이 우울했지만, 갈등이 깊었던 탓에 그런 관계조차 평화롭게 느껴졌다. 우리는 서운한 감정을 연료로 태우며 빠른 속도로 식어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다툼이 오래가는 이유는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서운함 때문이다. 서운함은 분노의 자양분이 되어 치정살인이나 존속살인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니 마음을 내어줄수록 분노는 커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다투는 이유는 서로의 가치관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크다. 과거의 검증된 지혜를 자식에게 강요하고, 자식은 새로운 세상의 생각을 부모에게 강요한다. 사랑하니까 이해해줄 거라는 암묵적 확신을 바탕으로 던진 말이 수용되지 않으면 서운함이 밀려온다. 우리는 사랑함에도 상처를 주는 관계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고로 우리는 바뀌었다.


우리는 왜 사랑하는 이들을 통해 고통받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시간이 충분할 거란 착각에서 시작된다. 적어도 자신은 사회가 말하는 일반적 수명을 충족시킬 수 있을 거란 착각이다. 아니었다. 나의 부모는 내가 대학에 가기 전에 술 취한 사람이 몰던 차에 치여 죽을 수 있고, 내 자식은 교복을 입은 채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죽을 수도 있었다. 평화로운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을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나에게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아버지 소식을 듣자마자 시골로 내려가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운전이 어려울 정도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 버릴 수 있었다는 사실에 지난날을 후회했다. 누군가 죽고, 그 누군가가 내 옆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뻔한 사실을 받아들였다면, 그렇게까지 마음을 베어버리는 말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책 ‘내가 알고 있는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은 죽음을 앞둔 고령의 노인들이 머무는 호스티스 병동에서 수년간 삶에 대한 인터뷰들을 엮어냈다. 그곳에서 한 노인은 ‘자신이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 죽을 수 있다는 명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배제한다. 이런 모순을 일찍 깨달았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날 선 말로 상처 주고 다음날 해도 되는 일 때문에 약속을 미루는 실수 따윈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인간은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고 인간인 나 역시, 매번 후회를 반복한다. 그 사람과 좀 더 잘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그 사람을 잃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을 텐데 말이다.


***

바쁜 일상에 치여 여름휴가마저 반납할 정도로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아버지 사고가 발생했고 얼마간의 시간 후 다행히 완쾌했다. 그리고 다음날 금요일, 오전 조회가 끝나자마자 휴가를 냈다. '바람 좀 쐬고 싶습니다'는 이유를 대자, 팀장은 아무 말없이 그러라고 했다. 한번도 이런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상에 없었던 휴가, 그것도 금요일, 갑작스러운 업무 백업에 날 원망할지 모른다는 눈치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눈빛은 위태로웠다. "안돌아 오는건 아니지?"라며 말하는 동료의 말이 마치 마음을 들킨것 마냥 두근거렸다. 이미 얼굴이 말하고 있었던건 아닐까. 그리고는 지리산을 향해 핸들을 잡았다.


차를 몰고 막연히 깊숙하게 들어갔다. 며칠 동안 사람이 없는, 걷는데 아무 방해가 없는 이를 모를 산을 찾아다녔고, 산장이 보이면 그곳에서 묵었다. 누런 낙엽에 파묻혀 걷기를 반복했다. 너무 오래되어 장소조차 기억나지 않는 곳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이름 모를 사찰, 그곳에서 삶이 나를 시험할 것이라 상상이나 했을까.


조촐하고 아담한 사찰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풍이 끝난 시기의 외딴 사찰에 누구도 오지 않은 듯 낙엽소리만이 사찰을 채웠다. 으스스한 절 입구를 지나니 시주함이 보인다. 틈으로 비치는 천 원짜리 몇 장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가 아님을 말해준다. 절 뒤쪽으로 나있는 길을 걸었다. 사실 길은 없었다. 머리만 한 낙엽들이 온 천지를 덮고 있었기 때문에 땅속에 묻은 장독 찾듯 마른 낙엽을 헤치고 걸었다. 너무도 고요한 탓에 강요된 침묵을 이어갔다. 작은 법당들을 지나 시선이 머문 곳에 별채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그곳에는 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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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주함 옆에 ‘한번 누어보시라, 그리고 새로 태어나라’는 문구에 눈길이 닿았다. 누워보고 싶었지만 선뜻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언제 왔는지 모르는 방문객이 남겨둔 지폐 몇 장만이 ‘네가 처음 눕는 사람은 아니야’라고 말했다. 스산한 분위기는 너무도 충만해, 관에 누어버리면 산속 정령들이 저승을 향해 관을 들쳐 맬 것만 같았다.

왼발을 들어 관에 들이밀었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드는 갑갑함에 ‘내가 죽을 때는 좀 넓게 해달라고 해야지’하고 생각하다가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화장을 할 거니까 상관없으려나’


강시처럼 어깨를 앞으로 민 채 누웠다. 자연히 팔은 포개지면서 X가 만들어졌다. 관 뚜껑은 상당히 무거웠다. 뚜껑 자체 무게도 있지만 힘을 쓸 수 없는 자세였기 때문에 힘겹게 덮었다. “딸깍” 관 뚜껑은 관 하부와 정확히 일치했고 한 줌의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죽음 이후를 생각하려 했다. 어두운 밤, 불 꺼진 방에 앉아 명상했던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갑자기 관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우박이 떨어지듯 날카로운 무언가가 관을 사정없이 두드렸고, 그것은 관에 못질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귀신 짓인가?’

말이 되지 않는 상상임을 알고 있었다. 이것들은 분명 바람에 날린 낙엽이 관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였다. 좀 더 생각해보고 싶었지만 큰 걸음으로 뛰기 시작한 심장은 모든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관 뚜껑을 들어 올렸으나 올려지지 않았다. 조금 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때부터 상상은 관 위에서 못질하는 도깨비들을 만들어냈고, 이런 외딴 절에 의심스럽게 있는 관에 누워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죽을힘을 다해 관 뚜껑을 밀어내자, 사방으로 흩날리던 머리만 한 낙엽들이 관 속으로 들이쳤다. 시계를 보니 겨우 3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던 관속의 3분 동안 삶과 죽음 다시 삶을 경험했다. 그랬다. 죽음은 어디에나 있었다.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는 내 알바 아니라며 죽음은 호시탐탐 내 삶을 노리고 있었다. 그렇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내가 원한다고 늦출 수도 있는 게 아니다. 오늘 당장 죽을 수 있는데,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자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를 남길 필요가 있었을까?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오늘 누군가에게 상처 주면서, 나중에 화해할 날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랑하는 이들은 언제나 곁에 있을 거라 확신하기에 날카로운 말로 상처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삶을 관장하는 절대자로부터 ‘너는 부모보다 일찍 죽지 않을 것이다. 너의 배우자는 네가 만족한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려줄 것이다’라고 들은 것도 아닌데, 왜 하필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냐며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해줄 거였다고 삶에게 모진 말을 뱉는다.


미래도 과거도 중요하지만 관계에서 현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인간은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은지 볼 수 없다. 볼 수 있다면 그 시간이 끝났을 때다. 그러기에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다. 거창한 것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자주 연락하고 자주 만나고, 내가 당신을 얼마나 아끼고 생각하고 있는지 알려줘야 했다. 당신에게 주려는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당신 앞에 당당한 누군가가 되기 위해, 당신을 외롭게 해서는 안됐다.


사랑은 사랑이 떠난 후에야 그 사랑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상대가 나를 얼마나 아꼈는지 내가 그 사랑 안에서 얼마나 평온했는지 알게 될 때는, 우리의 시간이 그리 많이 않다는 걸 받아들인 후였다. 과거의 실수를 들추며 상처를 교환하고 올지도 모를 미래를 위해, 현재에 존재하면서 누려야 했던 교감을 무시했던 것은 가슴속 돌이 되어 여전히 마음을 짓누른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미뤄서는 안 된다. 소중한 사람과 바로 지금 존재해야 하며, 그 시간이 유한하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 이들이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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