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훈 Sep 12. 2022

세계여행 강연가가 농부가 되기까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자리면, 그것이 사업이던 아니던 상관없이, 언제나 묻는 질문이 있다.

‘귀농 전엔 뭘 하셨어요?’
‘귀농하신 계기가 있었나요?’

고난으로 켜켜이 둘러싸인 귀농의 현실을 듣기 전에, 어쩌면 사람들은 귀농할 수밖에 없었던 타인의 경험에서 ‘나와 비슷하구나’라는 안도감을 기대하는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삼일 밤낮을 새워 말해도 부족할 귀농 이야기에 앞서, 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여느 귀농인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직장생활을 했다. 충북 오창에 있는 반도체회사였다. 반도체를 만드는 이 업체는 삼성이나 하이닉스 같은 초 거대기업을 제외하면 반도체 업종에서는 알아주는 기업이었고 여전히 유효하다. 입사는 가뭄에 번개같이 진행되었다.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취업에 실패하면서 ‘설마 되겠어’라며 원서를 접수했다. 인력 충원을 위해 단 한 명을 뽑는 자리에서-후에 듣기로는 90명이 넘는 사람이 지원했다고 한다-면접관들은 다섯 명씩 일렬로 앉아 있는 사회 초년생들에게 이런저런 곤란한 질문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한 명을 위한 파티의 주인공이 내가 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대학 졸업장을 받기도 전에 취업 지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      퇴사 그리고 세계여행


 처음 1년은 시쳇말로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런 내게 충격과도 같은 소식, 바로 조직개편이었다. 날 뽑았던 간부는 다른 조직으로 발령 났고, 내가 일하게 될 거라 말했던 ‘해외 구매 개발팀’은 백지가 되었다. 그 말은 영어를 쓰며 해외를 누비기 위해 여기에 왔는데,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란 뜻이었다. 조직 개편은 일개 간부가 힘쓴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 간부를 원망했던 27살의 나는 매우 순진했던 모양이다.


 어찌 되었든 그 후부터는 회사 생활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뻔히 보이는 회사 생활이 나의 미래에 투영되기 시작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놀랄만치 적당한 월급에 길들여진 후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끝없는 스트레스와 싸운 마지막은, 타의에 의한 정리였다. 고군분투 후에 상처 입고 떠나는 까마득히 먼 선배들의 안타까운 뒷모습을 바라보며, 결국 나도 저 길을 걷게 될 거라 확신했다. 그러니 어차피 떠나야 한다면, 스스로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가 입사한 지 1년 반이었다.


 남은 5년 반은 제때에 떠나기 위한 준비를 위한 시간이었다. 여러 외국어를 독학하고, 글 쓰는 법을 배우고, 마케팅을 배웠다. 회사를 마치고 한 대학교 평생교육원의 부동산 경매 수업을 듣기도 하고, 주말에는 공방에 나가 가구 공예도 배웠고 영어도 가르쳐봤다. 그리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세계일주를 하고 싶어’ ‘내 버킷리스트야’와 같은 생각이기보다는, 여행이 직업이 되길 바랬다. 때문에 여행을 하면서 통장 잔고가 0을 향해 가지 않아야 했다. 지금은 흔한 단어가 된 ‘디지털 노마드’를 꿈꿨던 것이다. 1순위 계획은 스쿠버 다이빙과 스카이다이빙 강사 자격을 얻어 전 세계를 누비는 것이었고, 2순위는 여행을 하며 글을 쓰는 것이었다. 나는 걱정이 많은 편이라 예기치 않은 상황을 대비해 항상 3순위 계획까지 세워두는데, 바로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었다. 일을 하는데 제약이 없을 정도의 외국어, 신문이나 매거진과 같은 언론사에서 글을 의뢰할 정도의 글쓰기 실력, 이런 과정을 글이나 영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학습이었다. 때문에 여행 전뿐만 아니라 여행 중에도 스페인어, 인도네시아어, 글쓰기, 영상 편집, SNS를 부단히 공부했다.


 2년의 여행은 꽃밭에 누워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흘린 눈물 같은 위안이자, 간절히 원해도 안 되는 건 안된다는 상심이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올라가는 입꼬리, 시린 하늘에 눈물이 날 것 같은 설렘 이면에는 몇 번의 죽을뻔한 고비, 믿었던 것들의 배반, 실망과 상실이 공존했다.


 사실 여행을 떠날 때는 한국에 돌아올 계획 따윈 없었다. 앞서 말한 세 가지 계획 중 하나는 분명 되어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세상은 재능 없이 노력으로만 버텨온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대한민국 국적기를 향해 걸음을 옮길 때의 안도감은, 활주로를 짓밟으며 내는 바퀴소리에 불안감으로 요동쳤다. 꿈에서 깨는 시간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미처 알지 못했다.


-      노력은 돈이 된다.


 여행 전부터 부단히 노력해온 스페인어는, 2년의 여행 중 1년 3개월을 스페인어권에 머물면서 향상되어왔다. 덕분에 여행 중 만난 지인에게 강사 제의를 받기도 했고, 학원을 소개해준다고 했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는 직장생활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막연히 직장이 싫다기보다는, 홀로서기를 위해 수년간 감내해온 노력의 결과를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해 완성시키고 싶었다. 이유가 거창했지만, 그저 내 사업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국에 돌아온 2018년 8월은 해외여행이 절정인 시기였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과 같은 SNS에는 휴가를 이용해 동남아, 일본은 물론 유럽까지 오간 흔적이 넘쳤다. 더구나 다양한 문화와 저렴한 물가가 장점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수요가 폭등했다. 덕분에 스페인어 클래스를 열면 정원이 금세 찼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스페인어 수요가 늘면서 서울 유명 학원의 스페인어 강사들이 틈틈이 개인 강습을 진행했고, 줌과 같은 원격 기술이 보편화되면서 스페인어 시장에도 빈익빈 부익부가 만연했다. 내가 아무리 스페인어를 잘한다한들, 10년 남짓 머물거나 그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수원과 강남을 오가며 살기 위해 지식을 파는 시간이 이어졌다. 저며오는 간장에 신음하는 꽃게처럼, 고단함과 깊숙한 곳에서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불안감이 얼굴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데 어느 날 기회가 왔다.


 스페인어를 배우는 학생 중 한 명이 직장동료 3명이 스페인 순례길을 가려는데 스페인어를 가르쳐줄 사람을 구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그 순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대답이 나왔다.

“순례길 관련 정보와 연계해서 수업하면 되겠네요. 저도 40일간 순례길 걸었거든요. 다른 국가 이동하시면 관련 정보와 팁도 가능해요”

스페인어를 가르치면 한 명의 수업료지만, 특정 콘셉트를 잡아 스페인어와 연계하면 한 수업에 여러 명을 함께 가르칠 수 있었다. 게다가 목적이 같기에 서로 간 정보를 교환하고 마음이 맞는 이들은 여행을 같이 할 수 있기에, 언어 수업과는 달리 모객이 수월했다. 이런 식으로 ‘세계여행’ ‘스페인어권 문화’ 등의 이름으로 클래스를 만들었다. 좋은 일은 계속됐다.


 한 동영상 학습 사이트에서 강의를 만들자고 연락이 온 것이다. 꾸준히 올린 블로그 글과 유튜브 영상 덕분이었다. 아주 간혹 피로가 쌓이면서 버스에 졸다가 수업에 늦을 때가 있었고 이럴때마다 현장 수업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몸은 하나인데 이런 식으로 강제로 컨디션을 올렸다가는 한순간 번아웃될 것이 분명했다. 나를 복사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고, 이런 이유로 클래스 모집을 중단한 체 강의를 제작했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무언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수익은 전무했고 불안했지만, 그럴수록 집중해 단번에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출간 제의가 왔다.


 책을 출간하게 되면 신뢰도는 상승할 것이고, 동영상 강의와 강연일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한 달에 단돈 10원도 벌지 못한 수개월이 흘러, 강의 영상을 오픈하고 출간을 마쳤다. 여러 곳에서 강연 의뢰가 왔고, 같이 일하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상의 시간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코로나가 터졌다.


 코로나는 나뿐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밤 9시가 되면 식당이 문을 닫는 난국에 지적 유희를 위해 누가 스페인어를 배울 것이며, 국경이 막혀 비행사가 도산하는 판국에 누가 여행을 위해 컨설팅을 하고 강연장에 불러줄지 전무했다. 세계여행과 스페인 문화-역사에 관한 강의 영상을 제작하며 다시 하늘길이 열리길 학수고대한 날이 7개월이었다. 다시 수익이 전혀 없는 날이 이어지며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생산되고, 앞으로도 이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공포를 양산했다. 서른 후반의 위태로움, 밥벌이의 불안감, 길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 그렇게 나의 커리어는 산산조각 났다. 그럼에도 귀농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3년의 귀농을 정리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