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에 터진 코로나는 서서히 나를 옥죄었다. 1월에 잡힌 강연이 2월로 밀리고, 건강을 우려한 수강생들의 취소가 이어졌다. 뒤로 밀린 강연은 3월로 그리고 4월로 결국 모두 취소되었다. 문제는 이 빌어먹을 역병이 좀처럼 사그라들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스페인의 끔찍한 과거와 너무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독감은 1900년 초반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독감의 한 종류다. 이 독감이 최악의 전염병으로 각인된 이유는 사상 최악의 사망자 수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독감의 사망률은 0.1%를 하회한다. 반면 이번에 대 유행한 코로나19는 3~4%로 3~40배 강력하다. 하지만 스페인 독감의 사망률은 더 높았다.
당시 세계 인구는 약 16억 5천만 명이었고,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인구를 5천만에서 1억 명으로 추산한다. 때문에 이를 환산하면, 사망률은 3%에서 최대 6%라는 어마어마한 살상력을 가진 바이러스였던 것이다.
스페인 독감이라고 이름 지어진 이유도 흥미롭다. 이름과 달리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에서 발발한 질병이 아니었다. 독감은 이미 전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고, 아군의 사기저하를 막아야 했다. 때문에 독감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기사는 정부에 의해 통제되었다.
게다가 전쟁 앞에 독감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요인도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은 몇 안 되는 미 참전국이었는데,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보다 16년 앞선 1898년, 쿠바를 두고 미국과 벌인 전쟁에서 대패한 스페인은 전쟁에 참가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스페인은 독감으로 죽어가는 상황을 검열 없이 보도했고, 기사를 본 사람들은 스페인 독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코로나19가 스페인 독감처럼 대 유행을 겪게 될 거라 생각한 것은 봄을 지나 여름에 감염자가 줄어들 때부터였다.
스페인 독감은 봄과 가을 각각 1차와 2차 유행으로 나뉜다. 봄에 시작한 독감은 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키지 않았고, 여름에도 특별한 증가세는 없었다. 하지만 가을이 오면서 시작한 2차 유행은 강력한 전염성과 높은 사망률을 보였다. 대부분 독감이 면역력이 취약한 아이나 노인들에게 주로 발발한다는 통념과 달리, 2차 유행 때는 젊은 사람들에게 높은 사망률을 발생시켰다.
특히 미국의 경우 스페인 독감으로만 50만 명 이상이 사망한다. 이유는 1차 유행 종식의 섣부른 판단과 바이러스에 대한 시민들의 무지가 주요했다. 어찌 되었든 코로나는 우리의 바람에 역행하며 세상을, 나의 삶을 할퀴어 버렸다.
펑펑 울다.
그런 날이 있다. 의지와 달리 몸이 제멋대로인 그런 날 말이다. 조만간 잘 될 거라는 확신 없이 장기간 쉼 없는 삶에 노출되다 보면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우울함에 잠길 때가 있다.
‘이런다고 달라질까?’ ‘내일은 심장이 뛰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럼에도 의지를 다잡고 작업실로 향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 문턱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그저 너무 힘들었다. 청춘을 바쳐 체득한 경험은 역병 앞에서는 아무 쓰잘대기 없는 지식이었다. 당장 먹고살 걱정, 가족들의 걱정에 대한 미안함, 무엇보다 희망 없는 미래에 버티고 설 힘조차 없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14시간을 천장을 바라봤다. 물 두 잔이 허무의 시간 동안 몸 속으로 들여 보낸 전부였고, 그만큼의 눈물이 흘렀다.
세계 여행 중에 만난 친구가 찾아왔다. 텅 빈 지갑과 웃을 수 없는 내 상황을 들키지 않고 싶었지만, 세 달 전부터 약속한 일정을 당일 취소할 수는 없었다. 그날 소주 몇 잔에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세 개의 외국어를 번갈아 쓰며 누구보다 행복했던 세계 여행자였지만, 더이상 그때의 자신감은 티끌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상대의 귀국 축하가 되어야 할 자리가 나를 위로하는 연민으로 채워졌다. 그가 말했다.
“주제넘은 말 일수 있는데, 원점에서 한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 네가 열심히 노력한 건 알지만, 지금은 노력한다고 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밤새 놀며 다음날 떠나기로 했던 친구는 마지막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여행을 업으로 삼기 위해 청춘을 바쳤는데, 이제야 그 결실을 보게 되었는데, 참담한 현실은 유독 나에게만 가혹해 보였다. 세상이 원망스러웠고, 여행에 꿈을 품은 자신이 한심했고, 세계여행을 떠난 선택이 후회스러웠다.
농업에서 희망을 보다
무기력한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잠깐 내려와서 아버지 좀 도와줄 수 있니?
아니, 사무실에서 화물기사들의 일정을 조율하는 아버지일을 내가 뭘 어떻게 돕는다는 거지?
아버지는 예산군에서 화물기사 사무실을 운영하셨다. 직접 배송도 하고 일감을 동료들에게 연결시켜줬다. 하지만 코로나는 수도권도 모자라 예산 촌구석에도 창궐했다. 경제가 침체되자 회사들은 생산량을 줄였고 출하가 줄어들자 화물 기사들의 일감도 끊겨버렸다. 아버지 또한 고통의 시간을 홀로 버티고 있으셨고, 궁여지책으로 비닐하우스를 빌려 농사를 질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의 선택이 우리의 삶을 바꿀 거라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집에서 차로 25분이나 먼 거리에 비닐하우스 12동을 임대하셨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한 뼘 남짓 자란 쪽파가 땅속에서 발버둥 치는 좀비의 손처럼 바글거렸다. 아버지는 100m 남짓한 거리를 뻘뻘 땀을 흘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셨다(하우스 한동의 너비는 대략 8m이며, 12동이면 96m다). 숙성이 끝나지 않은 유박 비료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오자 절로 인상이 구겨졌고, 8월의 비닐하우스가 내뿜는 열기는 나미비아의 사막보다 후끈거렸다. 땀에 절은 티셔츠는 등에 반쯤 말려 올라갔고, 전날 내린 비 때문에 바지는 온통 진흙 투성이었다. 웅덩이에 고인 물에 비친 내 모습은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주말마다 예산에 와서 아버지를 도왔다. 그러다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는데, 한 달 뒤 수확현장이었다. 하루 평균 700~800만 원의 매출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수일간 출하가 이어졌고, 농업에 대해 한없이 비관적인 나의 태도는 조건 없는 호감으로 바뀌었다. 물론 투입된 인건비, 종자비, 비료 및 방제비용을 제해야 순수익으로 남지만, 당시의 나는 벌써부터 희망의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후 진지한 고민이 매일 이어졌다. 농업의 장단점을 수도 없이 열거하고 극복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했다. 가장 문제는 농업을 시작할 자본이 없다는 것이었다. 5~6000만 원이야 어떻게는 구해보겠지만, 한 구간(1000~1200평 정도로 이루어진 농업진흥지역을 말하며 대부분 한 필지로 되어 있다. 시설 하우스 5~6동 정도의 규모다) 구매할 비용조차 없었다. 또한 가속화되는 인구 소멸, 기상이변 등에 대한 마땅한 대안도 없었다.
그럼에도 귀농이 희망적이었던 것은 그동안 내가 했던 것과 농업의 시너지가 가능해 보였다. 직접 클래스를 운영하고 강연일을 하면서 쌓은 마케팅 노하우가 있었고, 하루가 멀다하고 송부한 강연 계획서 덕분에 글로 남을 설득하는데 나름 자신 있었다. 오랜 여행 동안 보고 경험한 것을 가공품에 적용하고, 외국어는 수출 시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농업에 대한 전망이었다. 물론 가까운 미래에는 인구 소멸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들면 농산물 소비가 타격을 받을 것이고, 기상이변으로 농업이 계속 위기에 놓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수입을 조절하고 스마트팜과 같은 기술이 발전한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극복이 가능할 것 같았다. 게다가 농업은 다른 산업과 달리 안보와 밀접한 관계이기에 국가에서는 절대 농업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처럼 농업은 포기할 수 없는 산업인데 고령화로 인해 생산자가 줄어든다면 경쟁이 낮아지니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시도였다. 더 이상 코로나로 인해 피폐해져 가는 나를 볼 수 없던 이유도 있었다. 그렇게 기승을 부리던 여름이 선선한 바람으로 바뀔 때쯤, 귀농 길에 올랐다.
귀농, 할 만 한가요?
귀농 3년 차인 지금, 다시 농사를 짓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답하겠다. 하지만 할 수 있다면, 귀농을 마음먹었던 과거의 나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네 생각은 틀렸어.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해’
뉴스를 통해 듣는 일자리 문제는 인건비가 비싸서 사람을 살 수 없는 정도로 비친다. 하지만 그 시기는 이미 지난 지 오래다. 코로나로 인해 유출되는 만큼의 외국 인력이 입국하지 않았고, 동시에 농촌을 지키던 고령의 인력의 은퇴는 가속되는 중이다. 농번기가 겹치면 돈을 더 줘도 인력을 구하지 못해, 파종이나 수확과 같은 중요한 시기를 놓치기도 한다. 기상이변은 우리의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 번도 예측 못한 태풍이 오는가 하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폭우를 내려 작물이고 땅이고 모두 쓸어가 버린다. 여름은 점점 더 더워지고 겨울엔 눈이 오지 않아 지하수 고갈이 빈번하다.
농사만 잘 지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지만, 도매시장으로 향하는 협소한 유통구조 탓에 수익은 점점 악화되어 간다. 때문에 마케팅 능력은 농민에게도 반드시 갖춰야 할 능력이다. 여가를 생각할 겨를 조차 없는 업무 강도, 농산물 빼고 모두 오르는 비용, 대출 이자, '안보'라 칭하는 농업에 걸맞지 않은 정부의 외면이 귀농 3년 차인 내가 느끼는 ‘농업의 현실’이다.
반면 성공한 사람들도 존재한다. 귀농 1년 차에 안정화시킨 농가가 있고, 체험장과 교육 커리큘럼으로 수억 수십억을 버는 청년 농부도 많다. 귀농은 아니지만, 부모의 기반을 물려받아 안정적 농업을 이어가는 대농들도 있고, 처리 곤란한 아버지의 감자를 가공한 감자빵을 히트시킨 이미소 대표도 있다. 그의 매출은 200억이 넘는다. 이것이 일부의 사례라 평가절하해도, 농업은 전망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어려운 이유다.
지금까지 온갖 문제점을 열거한 나도, 귀농 후 2년 2개월 동안 시설 하우스 6동, 몇몇의 농기구, 가공설비, 특허, 그리고 개발한 가공품이 있고 1억 가량의 2차 가공 설비 구축을 앞두고 있다. 물론 부채 또한 수억에 달한다.
결국 귀농 또한 자신이 어느 면을 바라볼 것인가에 달려있다. 같은 현상을 두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이유를, 누군가는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기 마련이다. 다양한 변수를 충분히 고려하고 귀농했다 생각한 나지만, 현실은 그보다 혹독했다. 귀농 후 실패가 이어졌고 그럼에도 극복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여전히 피로와 불안 그리고 고독으로 충만한 나를 버티게하는 이유다. 때문에 억대의 부채와 자산 가운데서, 나는 그것을 희망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때문에 귀농이 할 만한 것인지는 스스로가 찾아야 할 숙제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