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 페스티벌 예찬
『지구촌 영상음악』과 『핫 뮤직』이 팝 음악 잡지 시장을 양분하고 있던 1999년, 잡지를 통해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록 페스티벌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이 인천에서 이틀간 개최된다는 내용이었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라인업이었다. 딥 퍼플, 드림 시어터,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프로디지, 그 외 크래시, 시나위 등 국내 유명 록밴드...
두 눈을 의심했다. 록의 불모지인 이 땅에서 전설적인 록 밴드들의 공연을 몇 팀씩, 그것도 이틀 내내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대한민국 록 음악사에 한 획을 사건이었다. 당시 저 유명 록 밴드들의 카세트테이프 음반을 플레이 할 때마다 설렘이 폭발하던 한 고등학생은 우리나라의 첫 번째 록 페스티벌이 성공하기만을 두 손 모아 바랐다. 그래야 나중에 록 페스티벌에 참가할 수 있으니까.
안타깝게도 제 1회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은 1회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우리나라의 첫 록 페스티벌을 축하(?)라도 하듯 비가 내렸는데, 그 비가 ‘너무 많이’ 내렸다는 게 문제였다. 하늘이 뻥 뚫린 듯 비가 퍼붓자 공연장 곳곳이 물바다가 됐고, 폭우에 대한 대비와 공연 운영 노하우가 부족했던 주최 측은 안전사고를 우려해 공연을 중지하기에 이르렀다. 둘째 날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공연장 한 쪽에 마련된 텐트촌에서 야영을 하던 사람들은 텐트 안으로 들이치는 비를 피해 인근 초등학교로 대피해야 했다. 결국, 제 1회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은 제대로 날개를 펴 보지도 못한 채 망하고 말았지만, 이 못다 핀 꽃 한 송이는 훗날 록 페스티벌 춘추전국시대를 여는 홀씨가 됐다.
2006년 군대에서 암울한 시기를 보내던 나를 더 암울하게 하는 소식을 접했다.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에서 이름만 살짝 바뀐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개최된단다. 망하기를 빌자니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처럼 없어져 버릴 것 같고, 잘 되기를 빌자니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인지라 배 아플 것 같고. 하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신분이라는 이등병이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나중에 접한 소식으로는 제 1회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로써 군대에서의 시간은 더 늦게 흘러가게 됐지만, (사회에 나가서 하고 싶은 게 많아질수록 국방부 시계는 더 느리게 간다) 국방부 시계도 가기는 간다고 2008년, 드디어 전역을 하게 됐다.
2008년, 전역과 함께 생애 첫 록 페스티벌 입성! 입구에서부터 저 멀리서 들려오는 헤비한 사운드가 벌써부터 나를 흥분시켰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지도를 볼 필요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흐름 속에 섞여 들어갔다. 도착한 메인 스테이지는 이미 광란의 도가니였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인 스테이지 옆에는 듣도 보도 못한 대형 앰프가 좌우로 10개씩 달려있었다. 록 음악 특유의 강렬한 사운드가 대형 앰프를 통해 뿜어져 나오자 거짓말 안 보태고 땅이 울렸다.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핵폭탄급 사운드를 받아내느라 옷이 떨리고 있었다.
그제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미쳐 날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도 이내 그들과 하나가 됐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가만히 있으면 그게 더 튀어 보이는 비현실적인 공간의 낯선 풍경! 나만 미쳐 날뛰면 나만 또라이가 됐을 텐데,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일제히 미쳐 날뛰자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됐다.
그날 이후 나는 매년 록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록 페스티벌 마니아가 됐다. 같이 갈 사람이 없으면 혼자라도 갔다. 대형 앰프에서 터져 나오는 사운드의 폭격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으면 다시 1년을 버틸 에너지가 재충전되는 느낌이었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웃는다. 더우면 더운 대로, 비가 오면 비 오는 대로 다들 신나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데도 싸움 한번 일어나지 않는다. 확실히 비현실적인 곳이다.
밤새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술에 취한 채 텐트에서 잠들면 다음 날 첫 공연을 하는 밴드가 나를 깨워준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중 자명종 소리에 깨어나는 것은 인간뿐이라고 히피들이 말했었나. 3일 내내 자연 속에서 음악만 들으며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지내다 보니 내가 히피가 된 기분이었다.
록 페스티벌 경력이 쌓이다 보니 요즘은 십여년 전과 비교해서 변화도 눈에 띈다. 록 페스티벌 시장에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몰리자 다른 록 페스티벌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제 살 깎아 먹기식 경쟁 속에 2개만 살아남았다. 그사이 사람들의 연령대가 높아지고 가족 단위 관객들이 늘어나는 좋은 현상이 눈에 띄는 한편, EDM 뮤직페스티벌의 여파 때문인지 록 페스티벌 참가 인원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세계와 우리나라 음악 시장의 흐름을 반영하듯 이젠 록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DJ들이 오르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주최 측의 입장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록 페스티벌을 보러 온 록 마니아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
(EDM 페스티벌 가면 온종일 EDM만 들을 수 있지 않은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관객들의 열정만은 그대로라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내성적이고 매사 다른 사람의 눈치 보는 성격을 고치고 싶은 사람들에게 록 페스티벌 참가를 적극 권하고 싶다. 성격이란 게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님을 알지만, 분명 변화는 있을 것이다.
그곳에 가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 록페스티벌에 얽힌 추억 하나
2010년, 중요한 연수를 앞두고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하필 연수 기간과 지산 록 페스티벌 기간이 겹쳤다. 다른 연수였으면 당연히 록 페스티벌을 선택했겠지만, 그 연수는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평생 가장 중요한 연수로 일컬어지는 연수였다. 연수를 위해 록 페스티벌을 포기하자니 록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가 당시 지구에서 제일 잘 나가던 MUSE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이렇게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늘 나에게 묻는 말이 있다.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나는 ‘뮤즈’를 선택했고, 선택은 옳았다. 그날 뮤즈와 함께한 그 밤이 너무 아름다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