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안에 갇혀있는 게 새장 안의 새처럼 답답하게 느껴질 때마다 하고 싶은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온종일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스쿠터를 타는 것이었다. 길거리 걸어 다니기는 휴가를 나와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스쿠터를 사는 것은 제대해야만 실현시킬 수 있는 꿈이어서 제대가 다가올수록 내 가슴은 부풀어만 갔다. 제대가 현실로 다가오자 그때부터 국방부 시계는 어찌나 느리게 흘러가던지.
군대 전역하자마자 샀던 '비노 50cc'
결국 그날은 왔고, 전역하자마자 스쿠터를 하나 샀다. 우리나라 모터바이크의 메카인 퇴계로에서 비노 50cc를 산 다음 고향으로 금의환향했다. 제주항에 내리는 순간 이미 세상은 내 것이었다. 스로틀을 땡기는 ‘손맛’과 바람을 가를 때 느껴지는 ‘바람의 맛’이 만나면 둘의 화학작용으로 아드레날린이 솟구쳤고, 스쿠터를 처음 탔던 그 날의 기억이 소환됐다.
그날은 어느 여름밤이었다. 삼양 바닷가에서 한치를 잡고 있으니 놀러 오라는 대학 동기 형님의 전화를 받고 가봤더니, 스쿠터가 한 대 주차되어 있었다. 30만 원에 중고로 산 택트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터바이크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어서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었을뿐더러 모터바이크가 굴러가는 원리에 대해서도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 없었다.
“형, 이거 어떻게 하면 앞으로 나가요?”
“그냥 시동 걸고 오른쪽 손잡이 땡기면 앞으로 나가”
지금도 그리운 그 이름. 택트!
이렇게 큰 덩치를 가진 녀석이 손잡이만 당기면 앞으로 나간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 허락을 받고 한 번 땡겨 봤다. 진짜 앞으로 나간다! 자전거와는 또 다른 느낌! 바람을 갈라 바람을 만들어 바람을 느끼는 바람의 맛이랄까.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 느낌이 잊히지 않았다.
결국 며칠 후, 전 재산을 들고 동네 바이크 가게를 찾았다. 스쿠터를 탈 때 면허증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나는 보급형 스쿠터 슈퍼캡(택트와 더불어 보급형 스쿠터의 양대 산맥이었다)을 전 재산 30만 원과 맞바꿨다. 그때는 스쿠터 탈 때의 기분이 너무 좋아서 밤마다 동네를 한 바퀴 돌다 오고는 했다.
잠시 샛길로 빠져볼까? 지금은 슈퍼캡보다 훨씬 더 좋은 바이크를 타는데도 그때의 느낌은 느끼려야 느낄 수 없다. 내가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어떤 물건의 몇 배의 가격을 주고 새로운 물건을 산다고 몇 배의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더라는 거다.
언젠가 버마 여행에서 사탕수수를 파는 아저씨 한 분이 스쿠터에 스티커를 정성스럽게 붙이고 계시는 모습을 봤다. 스쿠터 가격을 물어봤더니 사탕수수를 수백, 수천 번은 팔아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얼마나 힘들게 돈을 모아서 스쿠터를 샀을까 생각하니 그제야 스티커를 붙이는 아저씨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결국 마음의 문제이다. 내가 무엇을 소유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물건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임을 사탕수수 아저씨께서 일깨워주셨다. 나 또한 30만 원짜리 중고 슈퍼캡으로 시작해서 비노 50cc를 거쳐 지금은 한때 나의 드림 바이크였던 베스파를 타고 있지만, 처음 삼양 앞바다에서 30만 원짜리 택트를 탔던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모터바이크의 탈 때의 기분이 처음 탈 때의 그것만큼은 아닌 게 사실이지만, 여전히 바람을 가르는 맛은 대체 불가능한 무엇이다. 모터바이크의 가장 큰 매력은 자전거보다는 빠르게, 힘들이지 않고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으면서도 자동차처럼 프레임에 갇힌 세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데 있다.
프레임에 갇힌 세상
우리가 흔히 최고의 여행 수단으로 손꼽는 자동차는 분명 훌륭한 이동 수단이지만 자동차에 앉아서 바라보는 세상은 사각형의 프레임, 그것도 유리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다. 유리창을 내리고 바람을 맞으며 간다 하더라도 모터바이크처럼 맨 눈으로 보는 세상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단, 악천후가 자동차와 모터바이크의 위상이 엇갈리는 지점인데, 악천후도 여행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이면 크게 문제 될 것 없다.
내가 꿈꾸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나는 스쿠터가 좋다. 여러 자전거 종류 중에서 픽시 자전거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스쿠터 특유의 단순함이 마음에 든다. 기어를 바꿀 필요도 없고, 애써 자세를 낮출 필요도 없으며, 스쿠터 대부분이 125cc 이하여서 그 어렵다는 원동기 면허를 딸 필요도 없다. 바이크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저 시동을 걸고 스로틀을 땡기기만 하면 된다. 그 단순하고 직관적인 메커니즘이 좋다.
언젠가는 로얄 엔필드를 한번 타보고 싶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브래드 피트가 탔던 클래식 바이크 로얄 엔필드! 로얄 엔필드가 제법 어울릴만한 중년의 나이가 되어 지금 타고 있는 베스파를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오면 베스파를 타고 유라시아 횡단을 해보고 싶다. 몇 달 동안 베스파를 타고 러시아와 몽골, 유럽 전역을 여행한 후, 동유럽 어딘가에서 마음 따뜻한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에게 선물해주는 것으로 정든 베스파와는 아름다운 이별을 하리라.
체 게바라의『모터사이클 다이어리』( 23살의 청년 체 게바라는 절친 알베르토와 함께 떠난 남미 여행에서 세상의 불평등과 구조적 모순을 깨닫고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다. 동명의 영화에 그 여정이 잘 담겨있다)나 이완 맥그리거의『롱 웨이 라운드』,『롱 웨이 다운』처럼 길 위에서 길도 잃어보고, 멋진 경치가 나오면 소리도 질러보면서 무한의 자유를 느끼고 싶다.
(바이크 마니아로 유명한 배우 이완 맥그리거와 그의 절친 찰리 부어만이 BMW 바이크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한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롱 웨이 라운드』이다. 훗날 아프리카 대륙 종단을 한 번 더 하는데 그 여정은 『롱 웨이 다운』에 기록되어 있다.)
얼마 전, 바이크를 타다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껏 나는 바이크의 방향을 틀 때 핸들을 돌리는 만큼 바이크의 방향이 바뀐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물론 급격한 방향 전환을 할 때는 핸들을 돌려야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몸의 무게중심을 조금씩 이동하면서 방향을 틀고 있었다.
우리 인생도 라이딩과 다를 바 없다. 삶의 무게중심을 잡는 건 결국 나여야 한다. 적절히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내가 가는 길에 집중해야 하고, 때로 내가 가는 길의 방향이 잘못됐다 싶을 때는 과감하게 핸들을 돌릴 줄도 알아야 한다. 뒤에 누군가를 태웠을 때는(다른 사람과 뭔가를 함께 할 때는) 보다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하고, 때로 비바람이 칠 때는 오늘따라 바람이 시원하다고 말할 호기도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네 바퀴의 안정적인 자동차보다 두 바퀴의 탈 것들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