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피 지망생 Jun 01. 2020

별 일 없이 살지만 별 볼 일은 있다

잠의 공식을 풀다

내 몸 안에 자명종 시계가 달린 듯, 잠에서 깨는 시간이 일정해졌다. 셋 중 하나다.

새벽 3시, 아침 6시, 아침 7시 50분.


1. 새벽 3시


캠핑카에 살면서부터 일주일에 한두 번은 새벽 3시에 잠에서 깬다. 오늘따라 너무 일찍 깼다 싶어서 시계를 확인하면 항상 새벽 3시다. 이쯤 되면 '잠의 공식'이라 이름 붙여도 될 듯하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새벽 3시에 일어날 때의 공통점을 찾아낸 후에야 '잠의 공식'을 풀 수 있었다


# 잠의 공식

= 잘 때 입는 옷의 두께와 새벽 3시에 깰 확률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 즉, 옷을 얇게 입고 자면 새벽 3시에 깰 확률이 높아진다.


수십cm 콘크리트가 외부의 열을 차단해주는 집과 달리 캠핑카는 두께 몇 mm짜리 철판과 단열재가 전부다. 때문에 옷을 따뜻하게 입고 자야 하는데, 옷 껴입 귀찮아 얇은 옷 하나만 입고 잠들 때가 있다. 이런 날은 어김없이 새벽 3시에 깬다. 새벽 3시에 기온이 급강하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추론을 해 뿐, 3시 10분도 아니고 2시 45분도 아닌 왜 하필 3시 정각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캠핑카에서 처음 잤던 날도 새벽 3시에 깼다.

잠에서 깬 김에 바람이나 쐬자 문을 열어젖힌 순간 밤하늘에 쏟아지던 별!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선연히 빛나던 별들을 보며 나는 시 황홀했다. 온 세상이 가장 어두운 시간에, 별은 가장 밝게 빛났다. 새벽 3시에도 달빛은 비추었고, 는 달빛만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은 알아볼 수 있겠다며, 달빛만으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누군가가 여럿 있다는 생각에 잠시 설렜다.

그 날의 기억 때문에 새벽 3시에 깨는 날엔, 일부러라도 창 밖 바라보고 다시 잠을 청하곤 한다.

내 고물폰으로는 별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그나마 느낌 비슷한 사진으로...


별 일 없이 살지만 가끔 이렇게 별 볼일은 있어서, 새벽 3시에 일어나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2. 아침 6시


내 집 옆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냇가 옆에는 나무가 울창한 숲이 있다. 평소에는 새가 보이지 않는데 아침 6시만 되면 새들의 떼창이 숲을 가득 메운다. 새들도 밤에는 자다가 아침 깨나 보다.

새들이 사는 곳

자연의 속살로 걸어 들어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 몰래 엿보는 일은 늘 짜릿하다. 잃어버린 몸의 감각 하나둘 회복되는 듯하다. 이젠 시냇물 소리만 듣고도 날씨를 추측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비가 오는 날엔 시냇물이 불어나 시냇물 소리 훨씬 크고 경쾌하게 울린다. 창문을 열기도 전에 밖에 비가 오고 있음을 '감각'으로 알 수 있다.

시냇물은 하루도 쉼이 없다

이렇게 5감의 대부분을 활용해 산다는 게 자랑이라면 자랑이다.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새소리를 들으며 일어난다.(청각) 가끔 날씨가 춥게 느껴져(촉각) 일찍 일어나는 날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멍 때린다(시각) 채식 지향 식단을 통해 미각 세포도 살아나고 있다.(미각) 5감 중 후각만 남았다. 가끔 내 집 열린 창문 틈 사이로 꽃 향기가 새어 들어온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3. 아침 7시 50분


안타깝게도 세상살이에 찌들어 쳐버린 날엔,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새는 늘 아침 6시에 날 깨우는데,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이럴 때 날 깨우는 건 핸드폰 알람 소리다. 알람 소리를 듣고 깨어나는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지구 상에 자명종 소리를 듣고 깨나는 생물은 인간이 유일하다던데, 이 운명의 굴레는 언제쯤 벗어던질 수 있으려나.


그래도 나에게 위안이 되어주는 게 있다면,  문을 열고 나가면 늘 한결같은 풍경이 펼쳐진다는 것. 여기서 한결같다는 건 '한결같이 똑같다'가 아니라

한결같이, '볼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 의미한다. 늘 비슷해 보여도 자세히 보면 다르다. 하늘의 색이 다르고, 구름의 모양이 다르고, 바다의 빛깔이 다르다. 이들마저 비슷하다 느껴지는 날엔 배라도 지나가더라. 가끔 사람이 지나갈 때도 있고.. 

그래도 어제와 다름을 찾을 수 없을 땐, 내 마음이 라졌음을 느낀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내일은 또 오늘과 다르리라는 기대는 생동하는 데려온다. '나,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실감!


얼마 전 읽다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만 철학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라면, 철학에서는 시간이 흘렀다고 하지 않는다"


내 삶의 시간은 분명 흘러가고 있다. 결국 바다의 품으로 흘러가는 저 시냇물처럼..




날씨가 점점 더워진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 해발고도를 높여 산으로 올라갈 계획이다. 그땐 밴 라이프의 첫 목표였던 '월든(헨리 데이비드 소로 作)' 같은 삶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는 여기 이 자리에서, 자연의 선물을 마음 가득 담아가련다.










이전 10화 채식이 내게 가져다준 것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