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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 싶은 날, 떠있고 싶은 날

by 히피 지망생

그런 날이 있다.

이유 없이 떠나고 싶은 날. 사람에 치이고 싶지 않은 날. 세상과 멀찍이 떨어져 있고 싶은 날.


이런 날을 대비해 작년에 사둔 패들보드 있다. 패들보드가 뭔가 하는 분을 위해 설명하는 데 사진 한 장이면 충분하다. 이렇게 생긴 녀석이다.

패들보드 처음 탔던 날

평소엔 차 조수석에 찌부러져 있다가 떠나고 싶은 날 꺼내 공기를 주입하면 작은 배가 된다. 서핑보드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서핑보드는 파도의 힘을 동력삼아 타는 원리라 파도가 있는 날만 탈 수 있지만, 패들보드는 파도가 없는 날도 장날이다. 노를 젓기만 하면 내가 가는 곳이 길이 된다.


요즘 장마기간이 길어지면서 볕 좋은 날이 드문데 간만에 햇빛이 비치니 오늘이다 싶었다. 블루투스 스피커에 좋아하는 음악을 담고 집 앞 바다로 향했다.


앉아서 노를 몇 번 저었더니 잘도 나간다. 때마침 노을이 졌다. 이제 오늘의 미션을 수행할 차례다.


바다 위에서 좋아하는 음악 들으며 노을 보고 멍때리기. (두 발은 바다에 담가주는 센스!!)


그렇게 한참을 떠 있었다. 패들보드 옆에 걸터앉아 두 다리 바다에 담그고 그새 멀리 떨어져버린 땅을 바라보고 있으니, 좋다. 그냥 좋다.


그렇게 멍 때리다 보니 사진 찍을 타이밍도 놓쳤다.

해가 제 집을 찾아가고 어둠이 제 집을 찾아오고 나서야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 들었는데...

기분이 너무 좋은 거다. 내 몸의 모든 감각세포 깨어나 춤을 춘다. 솔직히 흐르는 음악에 맞춰 보드 위에서 춤도 췄다.

내 눈 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풍경(시각), 파도 부서지는 소리(청각), 바다 특유의 비린 듯 비리지 않은 내음(후각), 적당한 온도의 바닷물에 담긴 두 발의 감촉(촉각). 모든 것이 완벽! 시원한 맥주 한 잔 있으면 환상적이겠다 싶다가 이만하면 됐지 뭘 바라나 싶어 이내 마음을 접는다.


그렇게 2시간을 더 떠있었다.

'보드카 바이브'라 이름 붙인 내 플레이리스트가 끝날 때까지.(검정치마로 시작해 Sam smith로 끝날 때까지 2시간 반이 걸린다)

예상시간을 훨씬 초과하여 밤 10시가 되어서야 땅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좋아하는 음악, 노을, 별, 밤배, 밤바다, 바닷물의 부드러운 감촉)이 모여 시너지 효과까지 일으키는데 여기서 뭔가를 더 바라는 사람은 행복의 자격이 없다.

난 이기면 됐다.

내가 행복을 느낄때마다 나지막이 내뱉는 표현이다.


늘 말하지만, 행복은 돈이 아니다. 좋아하는 뭔가를 할 때 느껴지는 감정일 뿐. 그래서 좋아하는 뭔가를 아는 사람에게. 그런 게 여러 개 있는 사람에겐 행복해지는 것만큼 쉬운 것도 없다.


내가 땅으로 돌아온 이후로도, 밤하늘엔 별이 가득했고 한치 배들은 부지런했다. 다음에 또 바다에서 밤을 맞이해도 이 아름다운 풍경은 그대로 일거라는 뜻이다. 어떤 날은 오늘 뜨지 않은 보름달도 뜨겠지?

그때, 나만 저기 저 그림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앞으로 자주 바다에 떠 있게 될 거 같다.

이렇게 또 하나의 행복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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