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가언니 May 13. 2021

혼자가 좋을까 함께가 좋을까



오늘은 J-24로 팀 훈련 대신, 1인용 요트인 레이저를 탔다. 레이저는 전 세계 120여 개 국에서 즐기고 있는, 1996년에 올림픽 종목으로 지정된 요트 클래스 이름이다. 원디자인 세일보트, 그러니까 규격이 명확하게 매뉴얼화되어있는 요트로, International Laser Class Association (ILCA)라는 이름의 레이저 협회에서 이를 관리하고 있다. 경기규정 또한 철저해서, 평소에는 비싼 정품 세일이 아닌 저렴한 메이드 인 차이나 세일로 연습을 한 사람도 공식 대회에는 ILCA 인증 세일로 출전을 해야 한다.


레이저 클래스에는 세 종류의 요트가 있는데, 남성용 스탠더드 Standard, 여성용 레디얼 Radial, 청소년용 4.7이 있다. 남성용, 여성용, 청소년용이라 말했지만 그렇게 성별로 규정된 바는 없다. 각각 탑승 적정 체중이 80~84kg, 66~70kg, 51~55kg로 제시되어있을 뿐이라서 여자가 스탠더드를 타도 상관은 없다. 나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가졌다는 이유로 (실력이 부족한대도) 스탠더드로 자주 연습했다. 실제로 대회를 보면, 중학교 때 4.7을 타던 남자선수가 체격이 커지면 레디얼로 레이저대회에 출전을 한다. 여자선수가 체격과 체력 조건만 된다면 스탠더드로 출전을 할 수도 있지만 국내에 그런 조건을 충족하는 여자 선수는 거의 없다고 한다.



오늘은 요트 타기 좋은 계절인 봄의 명성에 걸맞게 강풍이 불어서, 세일 사이즈가 작아 컨트롤이 용이한 레디얼을 차터 했다. ‘난 평소에 더 큰 레이저를 타던 사람이니까 레디얼 정도야.’ 라며 호기롭게 배를 타고 수역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빔 리치로, 그리고 크로스 홀드로 멋지게 상체를 눕혀 힐을 잡으며 달렸다. 변풍이 부는 곳에서 한바탕 난리를 쳤지만 무사히 빠져나왔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끝까지 올라오고 나니 힘이 빠져서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 서면 배는 멈춘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풍상이라고 하는데, 대략 풍상의 좌우 45도, 그러니까 총 90도의 범위 내로 들어가면 배가 움직일 수 없다. 이를 노고존 No Go Zone이라고 부른다. 바로 보는 정면이 거리상으로는 가장 짧은 코스가 되겠지만, 풍압과 양력으로 움직이는 요트의 코스를 잡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이다. 직선거리가 아닌, 지그재그로 돌아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쉬고 싶은 나는 일부러 노고존으로 들어갔다. 팀 세일링을 할 때도 쉬고 싶으면 노고존으로 뱃머리를 돌려놓고 음료수도 마시고 초콜릿, 과일도 나눠먹고 사진도 찍으며 쉬었었다. 팀 연습 때를 생각하며 그렇게 바람 방향을 맞춰 놨는데 메인 세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요동을 친다. 바람이 세일을 타고 한 방향으로 깔끔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니 세일이 이리 펄럭 저리 펄럭. 신들린 듯 흔들어대는 붐뱅에 머리를 맞아 나가 떨어질까봐 무서웠고, 무엇보다 시끄러운 세일 소리가 혼을 쏙 빼놨다.


'안 되겠다. 풍하로 천천히 내려가며 쉬어야겠어.'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내려가는 풍하코스로 바꿨다. 하얀 세일에 바람을 가득 안고 쭈욱 밀려 내려가는 그림에서 자주보던 그 모양이다. 요트를 모를 때는 바람의 힘으로 밀려 내려가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었다. 바람을 거슬러 풍상으로 올라가는 방법을 배우면서 그 속도가 느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은 그 반대여서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등지고 내려가는 것보다 빠르다. 나는 일부러 속도가 느린 풍하코스를 선택했다.


세일을 활짝 열고 쉬면서 내려가겠다고 방향을 틀었는데, 이건 웬걸. 오늘같이 바람이 센 날은 풍하범주로 달리는 러닝의 속도도 상당했다. 쉬고 싶은데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작년에 마지막으로 레이저를 탔던, 바람이 거의 없던 때를 상상한 내 잘못이었다. 정말이지 잠깐이라도 유유자적하게 배를 타고 싶었다.


바람의 각도를 못 맞추고 균형을 잃어 배가 옆으로 기울어져 빠지는 것을 캡사이즈 capsize라고 하고, 배가 완전히 뒤집혀서 세일이 바닥에 거꾸로 처박히고 헐이 뒤집어진 형태를 콜랩스 collapse라고 한다. 나는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콜랩스 두 번과 캡사이즈 네 번을 겪었다. 다행히 햇살이 따뜻한 날이었고, 웻슈트를 입어서 체온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5월 초의 강물은 아직도 차가웠다. 6번을 60kg가량의 배를 일으켜 세우고, 그 위로 올라가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체력이 급격히 소진됐다.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 힘이 없어요.”


함께 타는 세일러들에게 얘기하고 폰툰으로 방향을 돌렸는데, 돌아가는 것 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분명히 <꽃보다 남자> 지후선배는 하얀 천이랑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했었는데, 나는 이쪽으로도 못가고 저쪽으로도 못가고, 같은 곳을 맴돌고 있었다.


“아, 혼자서 세일 하나 컨트롤 못하고 정신도 못 차리면서 무슨 요트 에세이를 쓰겠다고. 어디가서 요트를 소재로 글 쓴다고 말하지 말아야지.”


자기 비하의 나락으로 빠지는 것은 이렇게 쉽다. 이 정도 세기의 바람을 우리 팀이 함께 했다면 내가 어리바리해도 능숙한 세일러들에 힘입어 신나게 스피드를 즐겼을 텐데, 혼자 있으니 너무 외로웠다.




“그렇다면 넌 팀 세일링이 맞는 거야.”


고집스럽게도 1인용 요트만 타는 친구가 말했다. 그는 요트 위에 혼자 있는 시간이 좋다고 했다. 바람이 세면 센 대로 강풍에 적합한 세일트림과 자세를 연습하며 흔치 않은 강풍을 즐기고,  바람이 약하면 약한 대로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요트 위에 누워서 온몸으로 시원하게 비를 맞았던 여름날의 어느 때라고 말했다. 평소에 끊임없이 울려대는 핸드폰이나 이메일에 치이는 비지니스맨이라도, 요트에는 핸드폰 없이 맨 몸으로 오를 수밖에 없다. 그에게는 나 하나만 생각하고, 내 몸 하나만 믿고 움직이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게다.


1인용 레이저가 아니라 다인용 크루즈 요트를 혼자서 즐기는 사람도 있다. 주말이면 혼자 바다 저 멀리 배를 띄워놓고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태양 아래 가만히 누워 있거나 혼자 책을 읽는 이에게 요트를 타는 것은 힐링일 것이다.


혹은 혼자서 러더를 조정하고 동시에 세일도 조절하며 다이내믹 세일링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해도 요트 위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발란스를 잡기 위한 하체 근육들이 사용되고, 세일 트림을 할 때는 상당한 상체 근육들이 사용된다. 세일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훌륭한 근력운동이다. 이에게는 요트를 타는 것이 강한 체력단련이자 스트레스 해소의 도구일 것이다.


반면에 팀을 이뤄 함께 타는 세일링을 지향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요트를 구입하기 전부터 팀을 먼저 구성하고 함께 공부하고, 일정을 조율하며 연습을 하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요트를 타는 시간이 네트워킹 시간일 수 있다.




“배 잡아 드릴게요. 잠깐 쉬러 나오시는 거죠?”

“오늘은 그만 타려고요. 저도 배 올리겠습니다.”


내가 들어온 이후에 한 명 두 명, 그렇게 모두가 폰툰으로 돌아왔다. 다들 강풍에서 세일링을 하느라 금세 체력이 소진됐나 보다. 서로서로 도와주며 해장(요트의 세팅을 해체하는 작업)을 하고 수다를 떠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난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함께하는 시간을 지향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팀원들과 함께 힘을 합치고, 합을 맞추고, 간식을 나눠먹는 시간이 이렇게 즐거운 것이었다니. 내 실력이 충분히 향상되어서 혼자서도 잘 다니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를 일이지만, 오늘따라 팀 훈련이 더 그리웠다.






글: Edi (https://instagram.com/edihealer)

그림: Sama (https://instagram.com/y.samsa)





이전 16화 요트대학에 다닙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