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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가언니 Dec 23. 2021

강아지계의 김종국

“우와~~완전 김종국이네.”

“응?”

“너희 집안은 개까지 근육질이야? 근육질 캥거루랑 가슴 근육이 똑같잖아! 우와~ 얘는 승모근도 있네!”

“커크크크킄”


내 핸드폰 잠금화면의 슈렉이를 보고 친구가 말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안 해봤는데, 그러네? 몸짱 캥거루랑 가슴 근육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2011년 슈렉이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생각했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2년이었다. 보통 개들은 10년 정도는 살 수 있고 오래 살면 12년 정도도 산다고 하길래 그냥 그렇게 믿었다. 20년은 인간의 100세와도 같은 것이라 그렇게 장수하는 개는 거의 없다는 말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이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슈렉이는 12살이 된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12년은 애당초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슈렉이는 11살이 꽉 채워지는 지금도 하루에 네 번씩 산책을 나가고, 매번 목줄을 잡고 있는 나를 힘으로 끌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정도로 힘이 천하장사 강호동이니 말이다.  가슴근육, 허벅지 근육은 말 할 것도 없고!


슈렉 바디프로필 대공개


Q: 어떻게 하면 그런 근육을 가질 수 있나요?

A: 산책 위주로 운동했습니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습니다.’와 다를 바 없는 이 대답이 정답이다. 엄마가 독감에 걸리셔서 하루 네 번의 산책이 힘들어지시자, 아빠가 아침에 슈렉이를 산책시키고 출근하신 후, 오후 산책 일정에 맞춰서 일찍 퇴근하실 정도로 산책에 진심인 집이 우리집이다.




“앙~ 너무 예뻐. 개먼지. 먼지 인스타 봐봐”

“슈렉이도 인스타 만들어줘. 유튜브를 하던지.”

“슈렉이는 이미 11살 할아버지라 예쁘지도 않고, 어릴 때만큼 재미나고 다이나믹한 일이 없어. 맨날 잠만 자거든. 어릴 때는 재미난 일이 정말 많았었는데. 정말 단어 그대로 ‘지랄’견이었거든. 집에 남아나는게 없었어. 하하하”


슈렉이 본인의 의견이나 건강상태와 상관없이 나는 슈렉이가 늙었다고 단정했다. 슈렉이의 늙은 인생에는 더 이상 흥미로운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딱 잘라버렸다.


눈밭을 수색중/ 엄마! 빨리빨리 따라오라구요~


오늘 슈렉이와 산책을 하면서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슈렉이는 산책을 나가면 여전히 모든 것이 궁금하다. 잔디밭에 들어가서 탐색을 하고, 어떤 개가 왔다 갔나 수색을 하고, 나무마다 마킹을 하며 자신의 소식을 동네 친구들에게 알린다. 매일 다니는 길이고, 심지어 하루에 네 번씩 다니는 길을 어쩜 저렇게 처음 와보는 길처럼 호기심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대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생기 넘치는 아이를 두고 난 왜 늙은이 타령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름 강아지와의 이별을 준비한답시고 <어느 개의 죽음>(장 그르니에 지음), <너의 시간이 다하더라도: 같은 시간 속 다른 속도로 살아온 우리의 이별 준비>(김유민 지음), <개를 잃다:반려동물과 이별할 때 준비해야 하는 것들>(엘리 라딩어 지음)과 같은 책들을 읽고 있었다. 반려견과의 이별에 관한 책을 5권쯤 읽고 나니 생각이 정리되기는 커녕 오락가락해졌다.


- 슈렉이는 늙었지만 늙지 않았다.

-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지만 나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다.

- 지금부터 이별을 준비해야 하지만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 식탐도 없어지고 잘 안먹겠지만 더 잘 먹여야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품는 애착은 상대가 주는 기쁨뿐 아니라 상대가 야기하는 근심에서도 비롯된다. 그 상대는 전적으로 당신의 책임이기에 성스러운 존재다. 만일 당신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지켜야 하는 장소가 있다면 그 장소에 사는 사람의 운명이 모든 사람에게 달려 있는 동시에 당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그곳이 성스러운 장소가 되는 것과 같다.  

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 중에서


슈렉이는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지켜야 하기 때문에 성스러운 존재이다.


https://youtu.be/oLawT0nv3zM

슈렉이는 요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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