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갈 때였다. 그 당시 우리 차는 남편의 선배가 10년간 타다가 넘겨준 낡은 소형차였다. 손을 보긴 했지만 세월의 흔적을 지우긴 힘들었다. 우리는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간식을 좀 사 먹고 다시 차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황당한 풍경이 펼쳐졌다. 앞에 서 있던 차가 후진을 하며 차를 빼다가 우리 차를 살짝 박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창문을 내려 확인을 하고는 별 일 아니라는 듯 그대로 다시 차를 빼 나가려고 했다. 우리는 급하게 그 차를 세웠다.
“아니, 방금 차 박으셨잖아요?”
앞 차에 타 있던 부부는 당황한 기색으로 차에서 내리더니 우리 차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보니깐 별로 티도 안 나는데 뭘 그래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황당해하며
“아니 그래도 사과를 하셔야죠.”라고 따지자,
와이프로 보이는 그 여자는 갑자기 자기들은 차를 안 박았다며 시치미를 떼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오래된 차이기도 하고, 스크래치도 여기저기 있는 상황이라 그들에게 수리를 해달라거나 보상을 해달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진심으로 사과하면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지르며 자기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우기니 약이 올라 욱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때 평소 점잖은 남편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사과만 했어도 이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건 아니죠. 경찰이랑 보험사 부를까요?”
그제야 앞 차의 남자가 발악하는 여자의 입을 막고는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차를 빼다가 잘 못 본 모양입니다. “라고 했다.
그때까지도 그의 와이프는 악다구니를 쓰며 ”아니,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라고 외치고 있었다. 남자는 와이프를 향해 조용히 하라며 소리치더니 얼른 당신도 사과하라고 이야기했다. 그제야 여자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남편은 ”네,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라고 말하고 차를 보냈다.
나는 살면서 제대로 사과하지 않아 일이 커지는 꼴을 많이 봤다. 물론 나도 안다. ‘사과한다는 것’은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인정은 모든 책임과 금전적 보상을 내가 지겠다는 말과 동일어일까 봐 두렵다는 것을. 그러나 ‘사과’와 ‘책임‘은 다른 말이다. 책임을 따지기 전에 ‘사과’는 인간적 도리에 가깝다. 대부분 피해자가 화가 나는 시점은 상대방이 제대로 된 사과 없이, 책임을 회피할 때이다. 눈 딱 감고 사과를 하고 시작하면, 사실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린다. 이 경험을 딱 한 번만 해 본다면, 우리는 ‘사과’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사과한다 ‘는 것은 용기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도 이 용기를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미안하다 ‘는 진심 어린 말 한마디로 끝날 일을 불리고 불려 기어코 인생의 큰 짐덩어리로 만든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말 한마디는 반대로 천냥 빚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아이들의 빠른 사과가 참 부럽다. 아이들은 자주 다투지만, 또 빠르게 사과하고 화해한다. 분명 우리도 ’미안해‘가 쉬운 아이들이었을 텐데, 언제부터 그렇게 사과가 어색한 어른이 된 걸까. 오늘도 나는 나의 잘못에서 도망치지 않았는가 반성해 본다. 제대로 사과하는 용감한 어른이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