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다.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며 끝까지 도전하는 주인공들이 참 멋있었다. 덜렁 밀짚모자 하나 쓰고 해적왕이 되겠다는 루피도 , 일단 ’농구 천재‘라고 우기고 보는 강백호도, 진화도 안 시킨 피카츄를 데리고 포켓몬 챔피언이 되겠다는 지우도, 다들 그 꿈이 참으로 황당무계했지만,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고 결국 꿈을 이뤄내고야 마는 그들이 나는 참 부러웠다. 무엇보다 어떤 어려움에도 포기 따위 없는 그 끝없는 자신감과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는 어른이 되어서도 내내 닮고 싶은 모습이었다.
현실은 어떨까? 외제차도 아닌데 자신감을 만땅으로 채워도 얼마 못 가 금방 엥꼬가 난다. 한국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 ’겸손함‘인 탓일까. 우리는 자신감을 채워 넣기 무섭게 ‘너 뭐 돼?’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바람을 뺀다. 물론 주변도 적극적으로 돕는다. 공부를 잘하면 ’공부만 잘한다고 될게 아니야.‘라고 하고, ‘이정도면 잘하는 거 아닐까?’ 싶으면 전국에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수두룩 빽빽이라는 사실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채우자마자 자신감은 모두 사라지기 바쁘지만, 모두가 다 산다는 ’갓생‘을 살기 위해, 서점에서 ’ 자기 계발‘분야를 서성이며 임시로 또 자신감을 채운다. 물론 이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이쯤 되면 연비가 보통 나쁜 게 아니다.
이루고자 하는 기준은 너무나 높은데, 그것을 이뤄나갈 동기와 자신감은 자꾸만 사라진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사람은 제일 먼저 꿈을 포기한다. 꿈 따위가 사치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관성화 되면 아주 기본적인 욕구들도 하나씩 내려놓게 된다. 그렇게 사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자신감을 채워야 할까. 그리고 그렇게 채운 자신감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뭘까?
나는 이 대답을 수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박사의 인터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수학 난제를 11개나 해결한 그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했다. 근거가 있는 자신감은 연약하다. 언제고 그 근거가 박살 나면 자신감 역시 쉽게 꺼지는 불꽃처럼 사그라든다. 그러므로 자신감의 근거는 밑도 끝도 없이, 그저 ‘나’ 자신이어야 한다. 나의 직관에 귀 기울이며 ‘잘해야겠다는 생각‘ 따윈 집어치우고 묵묵히 오늘을 살아내는 것. 돌고 돌아가는 것 같은 그 구불구불한 길이 나에게는 최적의 길임을 믿는 것이 지금의 그를 있게 해 주었다. 신기하게도 현실에 존재하는 그 역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하나하나 자신의 꿈을 이뤄낸 만화 주인공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가끔 나는 사실은 내가 어떤 영화나 만화 주인공인 것은 아닐까 상상하곤 한다. 황당한 생각이지만, 장점도 있다.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주인공이라면 분명 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 한 발을 나아갈 것이다. 실제로 이 ‘주인공 빙의법’은 내 인생에서 어려움들을 만날 때마다 심플하지만 명쾌한 해결법들을 안겨주었다.
다행히 우린 해적왕까지 될 필요가 없다. 그저 오늘의 하루를 견뎌낼 매일의 자신감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니 오늘은 조금은 철없지만, 의욕만큼은 넘치는 만화 주인공으로 빙의하여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을 부려보자. 의외로 잘 어울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