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장을 보는 데 비닐봉지에 담겨 수북이 쌓여있는 것들이 시선을 끌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봄동이었다. 판매가 시원치 않은지 떨이 처리하듯 모든 봉지마다 가격표가 이중으로 붙어있었다. 꽤 많은 양의 봄동이 단돈 870원. 그런데 의아했다. 이제 11월에 접어들었는데 벌써 봄동이 나오나? 전에는 빨라도 12월은 되어야 나왔던 것 같은데.
야채 코너 주변을 둘러보니 봄동뿐만 아니라 달래와 냉이, 씀바귀 같은 봄 푸성귀들도 한데 어우러져 있다. 더 희한하게 느껴졌던 것은 과일 코너에 놓인 수박이었다. '하우스 수박'이라는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지금이 봄인지, 여름인지. 나는 어느 계절 속에 살고 있는지 순간 헷갈렸다. 한편 장을 보며 하우스 재배 기술이란 게 얼마나 좋아진 세상인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봄동이 꼭 겨울과 봄 사이에 나와야 마땅하다는 나의 편견은 좋아하는 영화 속 장면 때문일 것이다. 봄동을 보면 '리틀 포레스트'의 국내판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혜원의 겨울이 떠오른다. 임용고시에 실패하고 도시를 떠난 혜원. 그녀가 몸도 마음도 탈탈 털린 채로 도착한 고향집에서 맨 처음 찾은 식재료는 텃밭의 봄동이었다. 까만 밤, 흰 눈 속에 폭 파묻혀 있던 봄동을 혜원은 야무지게 캐내고. 한 줌 남은 쌀로 지은 밥과 봄동 된장국으로 그녀는 오랜 허기를 단숨에 채운다.
'혜원이 캤던 눈 속의 봄동만 할까.'
가을 봄동을 바라보며 큰 기대는 들지 않았다. 제 때에 노지에서 나온 봄동만큼 다디달까. 그래도 가격이 크게 오른 배추와 견주어보면 봄동은 대체 식재료로 손색없으니 또 반갑고. 고작 봄동 한 봉지를 앞에 두고 이것저것 따지느라 주부의 마음은 쉴 새 없다.
이제는 소비의 여력만 갖춘다면 제철 상관없이 먹고 싶은 야채며 과일을 손쉽게 식탁에 올릴 수 있다. '제 때'라는 것을 기다릴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편리하고 풍요로운 시절에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제철 식재료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한 계절이 가고 오는 풍경을 지켜보는 재미 또한 반감될까 조바심이 들어서이다.
기나긴 겨울이 지겨워질 때쯤 봄동이나 달래가 얼굴을 보이면 새 봄이 왔음을 기쁘게 알아챘다. 날이 더울 때까지 안 보이던 수박이 그 무게감을 뽐내며 어느 날 가지런히 놓여있으면 시원한 반가움을 느꼈다. 그렇게 제철 채소나 과일로 계절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들은 내 삶도 차근차근 다음 페이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도록 해주었고. 때를 따라 알알이 맺힌 열매들 양손에 쥘 때면 기다리는 일에 서툰 나 같은 사람도 기다림의 의미를 곰곰 생각해보게 했다.
봄이 아직 멀었는데 벌써 봄동이 나오다니, 마트 안에서 나만 제자리인 것 같아 조급해진다. 때와 시기를 기다리며 사는 일이 어리석은 짓은 아닐지 순간 불안해진다. 아직 가을 안에 머물러 있는 내게 저 멀리서 앞선 계절이 얼른 따라오라고 재촉하는 것만 같다.
사라고 부추기는 사람도 없는데 봄동 한 봉지를 결국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곤 아무도 모르게 생각했다. 모든 게 빠르게 뒤바뀌는 세상에 나라도 시간의 질서만큼은 잘 지키며 살아야지. 제철을 뛰어넘는 재배 기술은 야채, 과일에게나 통하는 거고 사람 일에 기다림 없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게 있을까. 세상 느린 사람의 게으른 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