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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판적일상 Nov 12. 2018

주거권은 '인권'이어야 한다.

종로 고시원 화재 사건을 마주하며

얼마 전, 2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한 종로 고시원 화재 사건을 접하며 비통한 감정을 느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일은 언제나 마음 아픈 일이겠지만, 정말 안타까운 사고로, 잃지 않아도 되었을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더더욱 마음이 아프다. 더구나 이번 사건이 더욱 비통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 같은 사고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인재라는 점에서다. 사실 추거 취약 지역의 화재 사고는 올해에 벌어진 굵직한 사고로만 벌써 '밀양 세종병원 화재', '종로 여관 세 모녀 등 사망 사건' 등이 줄줄이 떠오른다. 


주요 현안을 가지고 글을 작성하는 내 업무의 특성상, 이에 대한 글을 작성했던 기억만 올해에 벌써 5번은 족히 넘는 듯하다. 그때마다 나는 사고에 관한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이에 대한 시정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같은 사고가 반복될 것임을 우려한 내용을 절절히 적어 내려 갔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래서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더욱 한이 된다. 


분명 우려했던 일이건만, 내 힘으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현실을 마주하며 나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일은 매우 고통스럽다.





지난번, 행복주택 일화를 이야기하며 나는 진정 몸을 뉠 수 있는 방 한 칸의 절실함에 대해 토로했던 바 있다. 이번 사건을 접하며 다시 느낀다. 대한민국 하늘 아래, 제대로 된 방 한 칸이 절실한 이들이 나 하나가 아니란 것을. 아니 오히려 나보다도 더욱 절실한 이들이 지천에 널려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말이다.


물론 노후 건물에 대한 소방법의 미비 등 '화재'가 발생한 원인 자체의 문제도 심각한 문제이며, 조속한 해결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에 앞서, 근본적인 주택 정책에 대한 필요성을 생각해본다.





이번에 사망한 이들은 대부분 창문조차 없는 방에 거주하다 탈출할 기회도 얻지 못해 안타깝게 목숨을 잃어야 했다. 고시원 자체가 거의 잠만 잘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을 갖춘, 보증금 없이도 살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저렴한 주거공간으로, 거기에 거주하는 이들에겐 그중에서도 창문이 있는 방은 최소한의 사치인 수준이다.


몇 년 전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의 고시원에 놀러 가 하루 잠을 잤던 적이 있는데, 단 하루 머물기에도 불편할 정도로 사람이 살기에 정말 열악한 수준이었다. 창문도 없어 환기도 되지 않을뿐더러 볕도 들지 않는 건 기본이었고, 개인 화장실도 없어 공공 화장실을 써야 했다. 공간은 굉장히 협소하여 잠만 잘 수 있는 공간만 최소로 나오는 수준이어서 주거 공간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생활도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말 그대로 '집 다운 집'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거기 누워 잠을 청하면서 나는 그 공간이 거의 사람이 죽어 눕는 '관'과 같다고 느꼈으니까.







공공임대주택 등 사회 취약 계층에 대한 주택 정책이 탄탄하게 설계되어 있었더라면, 그래서 주거취약계층에게 창문 한 뼘이나마 달린,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집 다운 집이 제공되었더라면, 그들은 그처럼 '집 답지 못한 집', 창문 조차 없는 작은 방 한 칸에서 유명을 달리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집을 가지지 못한 자가 집을 가지게 되기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게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주거권을 국민 모두가 차별 없이 누리고 있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지난 5월 파르 하 UN 인권이사회 적정 주거 특별보고관이 말했듯 '정부가 주거권을 인권으로 인식하여' 국가적인 주거 복지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주거 취약계층의 안전사고는 계속해서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부디 주거권이 인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공공임대주택 확대, 주거취약계층 전세임대 지원 등 관련 제도에 대한 확충과 보완을 조속히 이행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것은 단순한 투정이 아니다. "또 이렇게 죽을지도 모를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이젠 좀 막아달라"는 간절한 호소다.






사람이 죽으면 모두에게 공평하게 관 한 짝의 공간만이 주어지게 된다지만, 죽기도 전에 누군가는 관 한 짝 같은 공간만을 누리다 가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쓸쓸한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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