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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심 Feb 10. 2021

결혼, 그 속의 선입견

33-1.


나는 유독 대구 남자가 싫었다.


남편과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유년시절을 대구에서 보냈고, 부모님께서 대구에 살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바로 "저 대구 남자 싫어하는데"라고 말했을 만큼 나는 대구 남자는 모두 보수적이고 권위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과 연애하면서 느낀 점은 내 선입견은 선입견이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보수적이지도 권위적이지도 않았을뿐더러, 때로는 나보다 더 자유롭고 합리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싫다고 했던 '대구 남자'에게 빠졌고, 1년 여의 연애 끝에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는 대구인 시댁이 서울에서 거리가 있어 내심 좋기도 했다. 요즘은 부산도 하루에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만큼 KTX를 타면 금방이지만, 그래도 시댁이 너무 가까이에 있는 것보다는 덜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결혼을 하면 가끔 뵈니 더 좋은 모습만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던 속도로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른세 살에 결혼을 하다 보니, 이미 결혼을 한 주위 친구들의 선례들이 많아서인지 나는 결혼과 시댁에 대해 지레 겁을 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하더라도 며느리가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많은 일들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차례와 제사를 며느리가 지내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이 싫었다.


남자들은 꼼짝 않고 여자들만 분주히 움직이면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차려서 내야 하는 문화가 어렸을 적부터 싫었기에 남편에게 명절 두 번을 한 번은 친정에 가고 한 번은 시댁에 가면 좋겠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시댁 어르신들도 흔쾌히 허락해 주셨고, 더불어 제사는 모두 절에서 지내니 음식 준비 없이 참여만 하면 된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결혼하기가 무섭게 손주는 언제 안아보냐고 말하는 어르신들이 많다고 들어, 며느리가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시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은 온전히 부부의 결정이 되었으면 했고, 임신은 여자의 몫인 만큼 “어른 말 들어서 나쁠 것 없어”라는 멀에 휘둘려 출산에 대한 스트레스는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남편이 뭐라고 전했을지는 모르겠다. 노산이 걱정되실 테니 한 번도 말씀을 안 하시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어른들께서는 아직까지 인내심을 발휘하고 계시다.




남편을 만나기 전부터 해왔던 생각인데

우리나라의 결혼 준비에는 '당연한 것'이 참 많다.


결혼을 하면



당연히 남자가 집을 장만해야지,

당연히 여자는 혼수를 장만해야지.

당연히 남자가 예물을 해와야지,

당연히 여자는 예단을 해와야지.

당연히 사위는 손님 대접을 받고,

당연히 며느리는 부엌에 들어간다.


세상의 많고 많은 것이 변했는데 한국의 결혼에는 유독 불변의 법칙들이 존재한다.  



서울 집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집 값은 함께 부담한다고 하더라도 암묵적인 룰처럼 집은 남자의 몫인데 여자가 보탰다고 얘기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결혼 전 준비할 것도 많은데 긴 예단과 예물 위시리스트로 골머리를 앓는 이들이 적지 않다. 세상의 참 많은 것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데, 결혼만큼은 레트로 감성이 짙다.


그래서 내 결혼은 모던했으면 했다. 나도 한 남자의 아내로서, 시부모님의 며느리로서 내가 선의로 하는 행동들이 당연시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결혼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많은 것들을 깨고 싶었다.


물론 이는 나 혼자만의 결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나와 평생을 함께 할 남편의 동의가 가장 중요했고, 어른들의 허락도 필요했다. 다행히 남편도 내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남편은 시댁을 나는 친정 부모님을 설득하여 우리는 여러 '당연함'을 깬 가장 우리 다운 결혼 준비와 결혼식을 할 수 있었다.


우리의 주머니 사정에 맞는 집을 구하고 우리를 닮은 집을 꾸미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더 많이 배웠고, 어느 때보다 더 가까워졌다. 예단과 예물을 뺀 결혼 준비는 시간적으로 여유로워 여행을 다닐 수 있었고, 여행지에서 결혼반지를 골라 나눠 꼈다. 그리고 부모님의 손님이 아닌 우리의 손님이 주인 스몰웨딩은 허례허식 없이 두 사람의 결혼 서약에 초점을 맞추고 친구들의 덕담으로 뜻깊고 화기애애했다.




내가 생각하는 결혼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인생길을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진정한 행복을 찾는 여행 같은 것이다. 소위 말하는 스펙과 자산으로 앞으로 펼쳐질 인생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는 있겠지만 사실 살아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그래서 야속하게도 평생을 약속한 두 사람은 그 약속을 저버릴 수도 있고, 함께 행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가슴 설레며 평생을 약속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결혼에서 당연한 것이 있을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서로의 부모님을 위하는 마음, 그리고 사위와 며느리의 공경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는 만큼 행복한 결혼생활은 아내와 남편의 그리고 양가 부모님의 노력을 요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되, 나도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기를 바랐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결혼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예전의 나는 부모님 두 분과 내가 건강한 것을,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누릴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을 크게 감사하지 않았다. 어쩌면 잃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고, 내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그래 왔으니 그저 그러려니 했다.


부모님이 점차 나이가 드시고 주위에서 하나 둘 갑작스러운 부모님들의 부고 소식을 들으며, 부모님 두 분이 건강하신 것이 '당연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어른이 되고 나서야 어린 시절 내게 주어졌던 많은 것들이 부모님의 노력과 희생으로 주어졌던 것임을 그래서 '당연하지 않음'을 배웠다.


나는 여전히 가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당연하다고 여길 때가 있다. 그리고 가끔은 내가 열심히 했으니, 내가 잘했으니  것이라는 자만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른이  나는  자주 당연한 것은 없다는 생각을   알게 되었고, 많은 순간 감사한다: 내게 주어진 오늘을, 허락된 건강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웃을  있음을.


*이미지 출처: Martha Stewart Living,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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