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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Jun 11. 2020

교양 있는 늑대

우리가 책으로 할 수 있는 일들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 중에 20년 전에 나온 <난 무서운 늑대라구!>라는 책이 있다.


그림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면 어느 마을의 거리가 나오고 그곳에 바싹 마른 몸에 거칠거칠한 털, 눈은 뜬 건지 만 건지, 아니 거의 감고 있는 늑대가 등장한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인데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배가 너무 고파서 농장 동물들을 잡아먹을 참이다. 그는 농장으로 가서 마지막 힘을 쥐어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아우-우우우우-우우우.”


엥? 다른 동물들은 혼비백산 도망치는데, 오리와 돼지, 젖소 이렇게 삼인방이 꿈쩍도 안 하고 볼멘소리를 하는 거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책을 읽을 수가 없잖아.”


황당한 늑대는 삼인방의 태도에 체면을 구기고 이렇게 말한다.


“난 무시무시한 늑대라구.”


돌아온 대답은 늑대를 더 어안이 벙벙하게 했다.


“알아. 그러니까 다른 데 가서 무섭게 굴어. 우리는 교양 있는 동물들이야. 책 읽는데 방해하지 말고.”


자존심 상한 늑대는 당장 다음날 학교에 입학해 일학년 전체에서 일등을 해버린다. 삼인방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막 글을 배운 늑대가 책 읽는 소리에 조금 더 배워야겠다며 쫒아낸다. 오기가 난 늑대는 그 길로 도서관에 가서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해서 또다시 그들을 찾아가 책을 읽는다. 하지만 이번에도 퇴짜...


거기서 포기할 늑대가 아니었다. 남은 돈을 싹싹 긁어모아 처음으로 제 돈으로 책을 사서 밤낮으로 정성껏 읽은 다음, 다시 오리와 돼지, 젖소를 찾아간다. 그러고는 풀밭에 누워 그들이 듣거나 말거나 책을 읽는다. 결과는 해피엔딩인데, 읽으실 독자들을 위해 여기까지만.


이 책을 읽는 여러 포인트가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늑대가 변화하는 모습이다. 첫 장면과 다르게 늑대의 겉모습이 하나둘 바뀐다. 학교에 갈 때 빨간색 안경을 쓰더니 도서관에서 갈 때는 주황색 조끼를 입고, 서점에 갈 때는 근사한 모자를 쓴다. 얼굴 표정은 온화해지고 이빨도 더 이상 날카로워 보이지 않는다. 털도 뽀송뽀송해지고.


농장에 들어가는 행동도 변한다. 처음에는 울타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막 달려 들어갔는데, 그다음부터는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고, 점잖게 노크를 하다가 마지막에는 종을 울려서 자신이 왔다는 것을 동물들에게 알린다.


나는 책을 읽으며 많은 것을 배우는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금도 독서를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이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이다. 이것을 책을 통해 다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끊임없이 나를 각성시키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준다.

이 책의 주인공 늑대도 글을 배우고 책을 읽으면서 점점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커져갔다.(커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래서 작가는 안경, 조끼, 모자 등의 액세서리는 늑대가 자기 자신을 돌본다는 의미로, 늑대가 울타리를 넘는 모습은 타인과의 관계와 존중으로 보여준 게 아닐까.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거라고 말해주려고.


언젠가 <알쓸신잡>에서 유시민이 한 말이 생각난다.

“어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정말 있는 그대로 알고 이해해 주는 것이 가능할까요? (...) 내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도 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요. 그런데 이게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되게 외로워질 수밖에 없죠. 완전치는 않아도 나를 깊게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되게 세상이 밝아 보이거든요.”


유시민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도, 되어주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것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 보려고 책도 있고 공부도 하는 것이겠지. ‘존중’이라는 말이 오늘따라 되게 무겁고 더 잘 모르겠다.


글 베키 블룸, 그림 파스칼 비에, 『난 무서운 늑대라구!』, 아기장수의날개 역, 고슴도치

원제: A Cultivated W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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