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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민주화와 논란의 중심에서, 아웅산 수 치

by 박준영

아웅산 수치는 한국과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동남아시아 민주화 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그녀의 이름은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과도 같으며, 1988년부터 시작된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수치는 군사 독재 정권 하에서의 고난과 억압을 경험하며, 미얀마의 민주화와 정치적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싸워왔다. 그러나 그녀의 정치적 여정은 단지 영웅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많은 논란과 갈등을 낳기도 했다. 특히, 미얀마 내 소수민족 문제와 군부와의 관계에서 수많은 비판을 받았고, 그로 인해 국제 사회와의 갈등도 있었다. 그녀의 정치적 행보는 미얀마와 세계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장을 차지하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도전과 의문을 남기기도 했다.


아웅산 수치는 1945년 6월 19일, 미얀마의 양곤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 독립을 이끈 인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웅산 장군은 1947년, 수치가 겨우 두 살일 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미얀마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고, 수치는 그로 인해 아버지를 잃고, 그의 꿈을 이어받아야 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아웅산 장군은 1947년 미얀마 독립을 이끌기 위한 협상에서 주요한 인물로 활동했으며, 그의 지도력은 미얀마가 독립을 쟁취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미얀마 국민들에게 자유와 독립을 위한 이상을 심어주었고, 그로 인해 미얀마의 독립을 이끌어낸 후 '국민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1947년, 독립 협상 직후 미얀마 정부의 고위 인사들에게 암살당한 아웅산 장군의 죽음은 미얀마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죽음은 미얀마의 정치에 대한 큰 공백을 만들었고, 그의 이상을 이어받아야 할 인물이 누구일지에 대한 질문이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아웅산 수치는 그만큼 아버지의 죽음이 그녀의 삶에 미친 영향을 깊이 느끼며, 아버지가 남긴 독립과 자유의 꿈을 그녀 자신이 이어가게 된다.


AKR20210201079900104_01_i_P2.jpg 아웅산 장군 사진 앞에 선 아웅산 수 치 (출처: 연합뉴스)

수치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단지 혈연적 연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웅산 장군이 추구한 '독립'과 '자유'의 이상은 수찌에게 물려졌고, 그녀가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이유도 아버지가 남긴 유산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에게 단순히 가족의 비극만을 안겨준 것이 아니라, 그 후 이어지는 미얀마의 억압과 민주화의 싸움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한 인식도 함께 심어주었다.


아웅산 수치가 미얀마에서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과정은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해, 미얀마에서는 군사 독재 정부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당시 수치는 영국에서 가족과 함께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미얀마로 돌아오게 된다.


그녀가 미얀마에 도착하자마자, 정치적 불안정과 군사 정권의 억압을 목격하게 되었고, 민주화를 위한 활동에 나서게 된다. 1988년 8월 26일, 수치는 양곤의 쉐다곤 사원 근처에서 열린 대규모 시위에서 연설을 했다.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그녀의 외침은 단순히 미얀마의 국민들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추구했던 독립과 자유의 정신을 이어받고, 미얀마가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담은 선언이었다.


그때부터 수치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1988년 민주주의 민족동맹(NLD)을 창설했다. NLD는 1990년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군사 정부는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수치를 가택연금했다. 그녀는 이 가택연금 기간 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름은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국제 사회는 그녀의 고립된 투쟁을 지지했고, 1991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AKR20210201079900104_02_i_P2.jpg 노벨상 수상 연설을 하는 아웅산 수 치 (출처: 연합뉴스)


2015년, 수치가 이끈 NLD는 다시 한 번 미얀마 총선에서 승리했다. 수치는 국가고문 겸 외교부 장관으로 취임했고, 이로써 그녀는 실질적으로 미얀마의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확립하게 되었다. 2015년, 미얀마는 민주화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NLD는 다시 한 번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아웅산 수치는 국가고문 겸 외교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이는 미얀마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고, 군사 정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수립된 순간이었다.


수치가 정권을 잡은 후, 그녀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 중에서도 경제 개혁과 사회적 통합을 위한 노력에 집중했다. 수치는 미얀마의 오랜 군사 독재에서 벗어나 경제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 외국인 투자 유치를 촉진하고, 국내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정치적 자유를 확립하고, 민주적 제도를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녀는 군사 정권의 억압에서 벗어난 미얀마가 새로운 경제적 도약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경제 자유화와 시장 개방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그녀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로힝야족 문제였다. 2017년, 미얀마 군부는 로힝야족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폭력과 탄압을 자행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로힝야족이 살해되었고, 수백만 명이 방글라데시로 피난 갔다. 이 사건에 대해 국제 사회는 미얀마 군부의 '인종청소'를 비판했다. 하지만 수치는 군부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이를 "자위적 행동"이라고 표현하며, "인종청소"라는 표현은 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녀를 둘러싼 논란을 일으켰고, 국제 사회에서의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많은 이들은 그녀가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는 아이콘으로서, 군부의 만행에 대해 침묵하거나 이를 옹호한 것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2021년 2월 1일, 미얀마 군부는 총선 결과에 대한 부정 의혹을 제기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는 수치와 주요 정부 인사들을 구금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무너뜨렸다. 이는 미얀마 민주화 과정에 큰 후퇴를 의미했다. 수치는 다시 한 번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고, 그녀의 구금은 미얀마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녀가 이끄는 민주주의의 꿈은 군부의 쿠데타로 좌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웅산 수치의 삶은 고난과 희생, 그리고 끊임없는 정치적 갈등 속에서 이어졌다. 그녀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통해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치적 길은 항상 논란과 함께했다. 로힝야족 문제, 군부와의 협력, 그리고 군부 쿠데타에 대한 대응 등에서 그녀는 복잡한 정치적 선택을 해야 했다. 이 모든 요소는 그녀를 단순한 지도자가 아닌, 갈등의 중심에 놓인 상징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수치의 이야기는 단순히 미얀마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전 세계적인 투쟁의 아이콘으로, 그 길을 가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찬미의 감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아웅산 수치는 여전히 미얀마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그 물음은 그녀의 삶을 통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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