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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왕실을 개혁하라! 파누사야 시티지라왓타나쿨

by 박준영

태국 민주화 운동의 가장 뜨거운 순간마다 그녀의 목소리가 있었다. 파누사야 시티지라왓타나쿨(Panusaya Sithijirawattanakul), 혹은 ‘루응(Rung)’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 젊은 여성은 단순한 학생 운동가가 아니라, 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실 개혁 요구를 제기한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감옥과 법정, 그리고 거리에서 싸웠으며,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최전선에 섰다.

3500.jpg?width=465&dpr=1&s=none&crop=none 시위 현장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파누사야 (출처: The Guardian)


태국은 오랫동안 군부와 왕실이 정치적 권력을 공유하며 민주주의 발전을 억눌러온 나라다. 왕실은 태국 사회에서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간주되며, 헌법상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역사적으로 군부 쿠데타를 지지하거나 묵인하는 역할을 해왔다. 1932년 입헌군주제로 전환한 이후에도 군부는 수차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고, 왕실은 이를 묵인하거나 직접 개입한 전례가 많았다. 특히 2014년 프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총리가 주도한 쿠데타 이후, 태국의 정치적 자유는 심각하게 제한되었고, 왕실 비판은 사실상 금기시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파누사야와 같은 젊은 운동가들이 왕실 개혁과 민주주의 확대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것이다.


1998년 태국에서 태어난 파누사야는 방콕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정치와 사회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아이였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현실에서 본 것 사이의 괴리는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고, 불평등과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우게 했다. 탐마삿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곳은 태국 민주주의의 심장과 같은 곳이었다. 역사적으로 군부와 왕실 권력에 저항했던 장소에서, 그녀는 선배 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단순한 시위 참여자에서 지도자로 성장하기까지,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혹독한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2020년 8월 10일, 그녀는 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바꿔 놓았다. 탐마삿 대학교에서 열린 대규모 시위에서 그녀는 두려움 없이 무대에 올라 태국 역사상 금기시되었던 ‘왕실 개혁 10대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태국에서 왕실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요구사항은 그녀가 단독으로 작성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자유 청년(Free Youth)’과 ‘탐마삿 연합(United Front of Thammasat and Demonstration)’ 등 태국의 주요 학생 운동 단체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것으로, 파누사야는 이 단체들의 대표로서 해당 요구사항을 발표하는 역할을 맡았다.


국왕의 권력을 헌법의 통제 아래 둘 것

왕실 예산을 정부의 감사 대상에 포함할 것

왕실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할 것

군부 쿠데타에 대한 왕실의 지지를 금지할 것

국왕을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여기지 않을 것

왕실모독죄(형법 112조)를 폐지할 것

국민이 왕실을 비판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

왕실 재산을 공공재로 간주할 것

국왕이 선출직 정부에 개입하지 않도록 할 것

왕실이 태국 민주주의 발전을 방해하지 않을 것


이 발언은 태국 사회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젊은 세대는 열광했고, 거리 곳곳에서 그녀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반면, 군부와 왕실 지지층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곧이어 그녀는 왕실모독죄(형법 112조)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녀는 수감 중에도 단순히 침묵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정치범으로서의 처우를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시작했고, 몇 주가 지나자 그녀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녀는 교도소 안에서 동료 수감자들과 연대하며 정치범들이 처한 부당한 환경을 폭로했다. 단식 투쟁이 계속되자 국제 인권 단체들이 개입하기 시작했고, Amnesty International과 Human Rights Watch는 그녀의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SNS에서는 #FreeRung(루응을 석방하라) 해시태그가 퍼지며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3699439.jpg 방콕 민주기념탑에서 민주화와 왕실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대 (출처: Bangkok Post)

감옥 밖에서는 지지자들이 다양한 형태로 연대했다. 대학생들은 그녀를 지지하며 학교에서 연좌 농성을 벌였고, 예술가들은 그녀를 위한 거리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항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여성운동 단체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막을 수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연대하며, 그녀의 투쟁이 단순한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과 젠더 문제 해결을 위한 싸움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태국 정부는 그녀의 건강 악화를 이유로 보석을 허가했지만, 이는 단순한 일시적 조치였을 뿐이었다. 법정은 그녀를 여전히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고, 그녀의 자유는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었다.


태국의 최근 선거에서도 민주화 요구는 강하게 반영되었다. 2023년 총선에서는 개혁을 요구하는 야당인 전진당(Move Forward Party)이 예상보다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군부와 왕실을 지지하는 세력의 견제로 인해 결국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다. 이는 태국 내에서 민주화 요구가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군부와 왕실이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파누사야의 투쟁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운동가로서의 삶 외에도, 파누사야는 평범한 젊은 여성으로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녀는 음악을 사랑하고, 문학을 즐기는 사람이다. 시위가 없을 때는 친구들과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담소를 나누곤 했지만, 그녀의 삶은 운동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 사생활이 거의 사라졌으며, 정부의 감시와 보수 세력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한 명의 젊은이로서 사랑과 우정을 갈구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다.


파누사야는 단순한 반정부 운동가가 아니다. 그녀는 태국 민주주의의 아이콘이자, 젊은 세대가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존재다. 그녀의 행동은 태국 사회의 금기를 깼으며, 더 이상 정치적 침묵이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또한, 그녀는 여성 운동과 성소수자(LGBTQ+) 인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태국 내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분리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녀의 투쟁은 단순히 정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현재도 그녀는 법정에서 싸우고 있으며, 여전히 왕실모독죄로 인한 재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뜨겁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우리는 단순히 한 세대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태국의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태국 정부가 그녀를 가둔다고 해도, 그녀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는 없다. 거리에서, SNS에서, 국제무대에서, 그녀의 이름은 민주주의의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꿈꾸는 태국은, 언젠가는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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