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필리핀 에드사(EDSA) 거리는 수백만 명의 시민들로 가득 찼다. 1986년 2월, 마르코스 정권이 부정선거를 통해 다시 집권하려 하자, 시민들은 거리로 나선 것이다. 손에 손을 맞잡은 사람들은 폭력 없이 평화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했다. 마닐라의 하늘은 흐렸지만, 시민들의 눈빛은 결코 흐려지지 않았다. 탱크와 군인들이 거리를 메웠지만, 군인들은 끝내 시민들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았다. 20년 넘게 필리핀을 지배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는 더 이상 국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하야하고 해외로 망명했다.
에드사 거리의 수백만 명의 시민들의 눈빛은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에게로 향했다. 코라손 아키노는 시민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는 폭력 없이 이 혁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도 우리는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녀의 말은 시민들에게 힘을 주었고, 결국 비폭력 혁명으로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리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마르코스는 망명했고, 아키노 여사는 필리핀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코라손 아키노는 1933년 1월 25일, 필리핀 타를락(Tarlac) 주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본명은 마리아 코라손 수멩고 코후앙코(Maria Corazon Sumulong Cojuangco)였다. 아키노 여사는 부유한 지주 가문 출신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명문가에서 성장했다. 필리핀의 상류층답게 어릴 때부터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청소년 시절, 그녀는 필리핀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미국 뉴욕의 마운트 세인트 빈센트 칼리지(Mount Saint Vincent College)에서 프랑스어와 수학을 전공했다. 원래 그녀의 꿈은 변호사였으나, 1954년 니노이 아키노(Benigno "Ninoy" Aquino Jr.)와 결혼하면서 정치와는 거리를 둔 삶을 살았다. 남편이 정치계에서 떠오르는 유망한 인물로 성장하는 동안, 그녀는 가정에 집중하는 전형적인 주부로서 여섯 명의 자녀를 돌보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정치인의 아내로서 남편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한때는 정치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1972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이 계엄령을 선포하며 필리핀은 군사독재 체제로 접어들었다. 니노이 아키노는 마르코스 독재에 맞서 싸우는 대표적인 야당 정치인이었고, 결국 반정부 활동을 이유로 체포되어 장기간 수감되었다. 이때부터 코라손 아키노는 단순한 정치인의 아내가 아닌, 남편의 부재 속에서 가족을 책임지는 강인한 여성으로 변해갔다.
1980년, 마르코스 정권은 국제적 압력으로 인해 니노이 아키노를 미국으로 망명시켰다. 이들은 필리핀을 떠나 보스턴에서 몇 년간 생활했지만, 니노이는 여전히 필리핀의 독재를 끝내야 한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83년, 필리핀으로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의 귀국은 비극으로 끝났다.
1983년 8월 21일, 니노이 아키노가 마닐라 국제공항에 도착하던 순간, 경찰과 군이 그를 호위하듯 공항 밖으로 데리고 나갔고, 곧바로 총성이 울렸다. 그는 도착 직후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고, 공항 활주로에서 즉사했다. 그의 암살 장면은 수많은 카메라에 포착되었으며, 이 사건은 필리핀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코라손 아키노는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었지만, 슬픔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가족을 돌보는 삶을 택하는 대신, 남편이 남긴 민주주의의 꿈을 이어받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정치에 뛰어들 것을 망설였으나, 국민들이 그녀를 지도자로 추대하면서 점차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슬픔 속에서도 그녀는 주저하지 않았다. 남편이 남긴 뜻을 이어받아 거리로 나왔다. 마르코스 정권의 부패와 독재를 규탄하며, 시민들과 함께 민주화를 외쳤다. 그녀의 모습은 필리핀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고,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모였고, 그녀는 단순한 정치인의 아내에서 민주주의의 지도자로 거듭났다.
1985년, 마르코스 정권은 점점 국제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다. 니노이 아키노 암살 이후,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마르코스 정권을 지지하는 것을 점점 꺼리게 되었고, 필리핀 내에서도 반독재 시위가 격화되었다. 이에 마르코스는 1986년 대통령 선거를 조기 실시하겠다고 발표하며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당시 마르코스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고, 정치적 영향력도 약화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르코스가 조기 대선을 발표하자, 필리핀의 야권 세력은 혼란에 빠졌다. 기존의 야권 후보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지만, 많은 시민들은 코라손 아키노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출마를 망설였지만, 야권 지도자들과 국민들의 압도적인 요청을 받고 결국 출마를 결심했다. 그녀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 필리핀 전역을 돌며 평화와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그녀의 캠페인은 기존의 정치 캠페인과는 달랐다.
시민들은 노란 리본을 매고 그녀를 지지했으며, 이는 노란 물결(Yellow Movement) 운동이 되어 이후 노란색은 그녀의 상징이 되었다. 그녀의 선거운동 구호는 "Tama na, Sobra na, Palitan na!" (이제 충분하다, 너무 오래했다, 바꿀 때다!)였다.
1986년 2월 7일, 필리핀 국민들은 투표소로 향했다. 하지만 마르코스 정권은 대규모 선거 조작을 감행했다. 선거 결과는 조작되었고, 마르코스가 승리했다고 발표되었다. 하지만, 필리핀 국민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마르코스 정부의 공식 발표는 그가 53%로 승리했다고 조작했다. 선거 부정이 명백해지자, 필리핀 내외에서 거센 항의가 이어졌다.
부정선거에 분노한 필리핀 국민들은 1986년 2월 22일부터 마닐라의 에드사(EDSA) 거리로 나와 평화적인 시위를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인 피플 파워 혁명(EDSA 혁명)이었다. 결국, 군부가 마르코스를 버리고 아키노를 지지하면서 마르코스 정권은 붕괴되었다.
1986년 2월 25일, 코라손 아키노는 필리핀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했다. 같은 날, 마르코스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하와이로 망명했다. 코라손 아키노는 필리핀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국민의 힘으로 탄생한 지도자였다. 그녀의 대통령 당선은 필리핀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민주주의의 승리로 평가되었으며, 이후 여러 나라에서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
대통령이 된 후, 그녀는 1987년 새 헌법을 제정하여 독재를 방지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이 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고 의회의 독립성을 보장하며, 부패한 정치 구조를 개혁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또한, 마르코스 정권이 축적한 부정부패를 청산하고, 필리핀을 국제 사회에 다시 인정받는 민주국가로 자리 잡게 했다. 그러나 경제 개혁에서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고, 빈부격차 해소에 한계를 보였다.
그녀의 재임 기간 동안 군부 쿠데타 시도가 무려 7차례나 발생했으며, 이는 그녀가 충분한 정치적 기반 없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그녀는 필리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다.
코라손 아키노의 정치적 유산은 현재까지도 필리핀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녀가 이끌었던 자유당(Liberal Party)은 이후에도 민주주의와 개혁을 기치로 활동했으며, 2010년에는 그녀의 아들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3세(Benigno "Noynoy" Aquino III)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2016년 이후 로드리고 두테르테(Duterte) 정권, 2022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Bongbong Marcos) 정권이 들어서면서 자유당의 영향력은 점점 약화되었다.
아키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필리핀 민주주의의 확립이다. 그녀는 군사독재를 끝내고, 국민이 직접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는 민주적 절차를 복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경제 정책은 기대만큼 성공적이지 못했고, 필리핀의 빈곤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또한, 필리핀 정치가 여전히 가족 중심의 엘리트 정치(올리가르히)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가 꿈꿨던 완전한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필리핀 역사에서 비폭력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 에드사 거리의 동상처럼, 그녀의 유산은 필리핀 국민들에게 "민주주의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며, 지켜야 하는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