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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민주주의 계보를 잇다, 메가와티

by 박준영 Mar 20. 2025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Diah Permata Megawati Setiawati Sukarnoputri)는 인도네시아 현대 정치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녀는 1947년 1월 23일,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 차 있던 시기에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이다. 수카르노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로서 대중을 사로잡았고, 강력한 민족주의와 반서구적 입장을 내세우며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를 이끌었다. 


그러나 메가와티는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말수가 적었고, 외향적인 아버지와 달리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보였다. 정원을 가꾸는 것을 좋아했고, 가족들 사이에서도 조용하고 차분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그녀가 20세가 되던 1967년, 인도네시아의 정치 지형이 뒤바뀌었다. 아버지 수카르노가 군부 쿠데타로 인해 실각하고, 수하르토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녀와 가족들은 정치적으로 철저히 배제되었다. 수카르노는 연금 상태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메가와티는 아버지가 쌓아 올린 유산과도 단절된 채 살아야 했다.


수카르노 재임 시절 수카르노와 메가와티


그러나 그녀는 운명적으로 다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된다. 1987년, 그녀는 인도네시아 민주당(PDI)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후광이 있었지만, 그녀가 본격적인 정치 지도자로 자리 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993년, 메가와티는 PDI의 당 대표로 선출되었고, 그녀는 점점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하지만 당시 인도네시아를 30년 동안 통치하고 있던 수하르토 정권은 그녀를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다. 1996년, 군부는 PDI 당사에 난입하여 강제로 점거하는 사건을 일으켰고, 메가와티의 지도력은 강제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히려 그녀를 국민들에게 더 강하게 각인시켰다. 메가와티는 수하르토 독재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고, 1998년 수하르토가 물러나면서 그녀의 시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가 처음으로 민주적인 총선을 실시했을 때, 메가와티가 이끄는 인도네시아 민주투쟁당(PDI-P)은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대통령직은 그녀가 아닌 압두르라흐만 와히드(Abdurrahman Addakhil Wahid)에게 돌아갔다. 이는 당시 인도네시아 정치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으로 예상했지만, 당시 정치권에서는 여성이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2001년, 와히드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결국 그녀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정치적 리더십은 곧 도전에 직면했다.


메가와티의 리더십 스타일은 아버지 수카르노와는 달랐다. 수카르노가 강렬한 연설과 군중 동원을 통해 강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구축했다면, 메가와티는 조용하고 온건한 방식으로 정치를 운영했다. 그녀는 급진적인 개혁보다는 안정과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했고, 국민들에게 ‘강한 지도자’보다는 ‘국가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로 다가갔다. 


이는 인도네시아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이부이즘(Ibuism)’과 맞닿아 있었다. 이부이즘은 여성에게 국가와 가정을 돌보는 어머니의 역할을 부여하는 사회적 개념으로, 여성이 지도자가 되더라도 강한 정치적 리더십보다는 조정자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메가와티는 이러한 사회적 기대 속에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고, 이는 그녀의 리더십 스타일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 방식은 그녀의 정치적 역량을 제한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정부는 비교적 안정적인 국정을 운영했지만, 강력한 개혁이나 경제적 성과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직선제가 처음으로 실시된 2004년 대선에서 그녀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SBY)에게 패배하며 대통령직을 떠나야 했다.


메가와티는 2004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에도 정치에서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창당한 PDI-P(Partai Demokrasi Indonesia Perjuangan, 인도네시아 민주투쟁당)의 지도자로 남아 당의 기반을 유지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인도네시아 민주투쟁당(PDI-P)의 성장은 단순한 정당의 발전이 아니라 수카르노의 유산이 메가와티를 통해 재구성되고, 정치적으로 활용되면서 이어진 과정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현대 정치에서 PDI-P는 단순한 정당이 아니라, 수카르노주의(Sukarnoism)를 계승하는 상징적 역할을 맡아왔으며, 이는 메가와티가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인도네시아 국민들 사이에서 수카르노에 대한 향수는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으며, 그는 여전히 독립의 상징이자 민족주의의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메가와티는 이러한 정서를 활용해 PDI를 수카르노주의를 계승하는 정당으로 재구성했고, 이는 PDI-P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2014년 대선에서 메가와티는 자신의 대권 재도전을 포기하고, 당시 자카르타 주지사로 인기를 얻고 있던 조코 위도도(Joko Widodo, 조코위)를 PDI-P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조코위는 메가와티와 달리 친서민적 이미지와 실용적 정책 추진으로 국민적 지지를 받았고, 결국 대선에서 승리하며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되었다. 이는 메가와티가 당내에서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으며, 그녀는 이후에도 조코위 정부와 당의 운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메가와티와 조코위 간의 관계는 점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코위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점점 더 독립적으로 구축해 나갔고, 메가와티의 후견을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2019년 대선 이후, 조코위는 점차 PDI-P 이외의 세력과 연대를 모색하며 실용적인 정치 노선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당 내부에서 메가와티의 의중과 다른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는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갈등을 불러왔다.


이 갈등은 2024년 대선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었다. 메가와티는 자신의 딸 푸안 마하라니(Puan Maharani)를 PDI-P의 차기 대선 후보로 내세우고자 했다. 푸안 마하라니는 메가와티의 정치적 후계자로서 오랫동안 당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고, 국회의장을 역임하며 정치적 경험을 쌓아왔다. 그러나 푸안은 대중적인 인기가 조코위에 비해 현저히 낮았고, 메가와티가 밀어붙인다고 해도 승리가 확실한 후보는 아니었다. 반면, 조코위는 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를 지지하려 했으며, 결국 PDI-P 소속이 아닌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행보를 보였다.


PDI-P 정당 행사에 참석한 푸안, 조코위, 메가와티(왼쪽부터 순서대로) (출처: Kompas)


이러한 조코위의 선택은 메가와티와 PDI-P 내 강경파들에게 커다란 배신으로 비춰졌다. PDI-P는 전통적으로 메가와티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움직였으며, 조코위도 당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이 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제 조코위는 메가와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이는 PDI-P 내부에서 심각한 분열을 초래했다. 조코위를 지지하던 당원들과 메가와티 중심의 전통적인 PDI-P 세력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PDI-P의 결속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메가와티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였다. 그녀는 여전히 PDI-P의 상징적인 지도자였지만, 실제로 당을 장악하는 힘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조코위는 이제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메가와티는 점차 과거의 지도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는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권력이 세대교체되는 과정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메가와티가 정치적 유산을 유지하기 위해 더 강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도전에 직면했음을 의미했다.


메가와티의 정치적 유산은 여전히 평가가 엇갈린다. 그녀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 여성 정치인의 길을 열었으며, 민주화 이후 인도네시아 정치의 안정적인 전환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녀의 지도력은 종종 강한 개혁적 리더십보다는 상징적 리더십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수카르노의 강렬한 정치적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온화한 방식으로 재해석한 그녀의 행보는 민주화 이후의 인도네시아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보다 강력한 개혁과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특히 그녀의 정치적 행보는 인도네시아 사회의 '이부이즘(Ibuism)'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부이즘은 여성을 가정과 국가의 '어머니'로 규정하며, 여성 지도자가 강력한 권위를 가지기보다는 조정자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기대하는 사회적 경향을 의미한다. 메가와티는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여성이 지도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이부이즘을 전략적으로 활용했지만, 이는 동시에 여성 리더십의 한계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녀는 단순한 '여성 정치인'이 아니라 '국가의 어머니'라는 이미지 속에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했으며, 이는 그녀가 보다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하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PDI-P의 정신적 지도자로 남아 있으며,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그녀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알 수 없다. 2024년 대선에서 메가와티와 PDI-P는 이전의 영향력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지만,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정치 질서가 자리 잡게 될 것인지가 중요한 변수로 남아 있다. 확실한 것은, "수카르노의 딸"에서 "국가의 어머니"로 변모한 그녀의 이야기가 인도네시아 정치사의 중요한 과정이었으며, 그녀의 유산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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