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레사(Maria Angelita Ressa)는 1963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한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마리아는 필리핀에 남아 친척들과 함께 자랐다. 조용한 아이였고,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활자로 가득한 페이지 속에서 위안을 찾았고, 그것은 훗날 그녀가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게 되는 토대가 되었다.
10살이 되던 해, 마리아는 미국 뉴저지로 건너갔다.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와의 포옹은 따뜻했지만, 새로운 환경은 낯설고 버거웠다.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던 그녀는 교실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침묵하게 되었고, 침묵은 다시 고립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마리아는 도서관에서 답을 찾았다. 단어를 하나하나 적고, 발음을 익히며, 책을 따라 읽는 방식으로 언어를 배워 나갔다. 그런 노력이 쌓이며 학업에서도 빠르게 적응했고, 학교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는 과학과 문학 모두에 흥미를 느꼈고, 결국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해 두 분야를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원래는 의사가 되기를 꿈꿨다. 생물학을 공부하며 생명에 대한 관심을 키웠지만, 동시에 사회 문제와 글쓰기에 대한 열정도 커졌다. 대학 시절, 자신이 쓴 글이 학내 신문에 실리며 처음으로 ‘글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경험을 했다. 이때부터 언론이라는 직업이 그녀의 미래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졸업 후, 그녀는 CNN의 동남아시아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말레이시아 등지를 다니며 정권 교체, 무장 충돌, 인권 문제 등을 취재했다. 전쟁터와도 같은 현장을 다니며 그녀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의 무게와 책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언론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권력에 맞서 약자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는 수단임을 몸소 체험했다.
이후 필리핀으로 돌아온 마리아 레사는 필리핀 최대 방송사 중 하나인 ABS-CBN에 합류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녀는 약 6년간 뉴스 및 시사 프로그램 부문을 총괄하는 뉴스 디렉터(Head of News and Current Affairs)로 재직하며, 필리핀 언론의 중심에서 저널리즘 실무와 조직 운영을 모두 경험했다. 이 시기는 그녀가 국제적 감각과 디지털 시대의 변화에 맞춘 언론 모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전통적인 방송 뉴스가 디지털 전환을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그녀는 새로운 형태의 뉴스 플랫폼의 필요성을 고민하게 된다.
그 결과, 2012년 마리아 레사는 디지털 기반 탐사보도 전문 매체인 ‘랩플러(Rappler)’를 공동 창립했다. 처음엔 단순한 소셜 미디어 실험 프로젝트로 시작했지만, 이내 정치, 사회, 인권 문제를 다루는 본격적인 뉴스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Rappler는 전통 미디어와는 달리 SNS를 적극 활용하며,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방식으로 빠르게 주목받았다.
Rappler의 보도 철학은 “fact-based journalism(사실에 기반한 저널리즘)”이었다. 정부의 발표나 대기업의 자료에만 의존하지 않고, 현장 취재, 자료 분석, 데이터 기반 검증(fact-checking) 등을 통해 심층 보도를 지향했다. Rappler는 특히 정치 권력의 부패, 기업과 정부 간의 유착, 여성과 소수자 문제, 청년 세대의 참여 정치에 주목하며 기존 언론이 다루지 않던 이슈를 적극 보도했다.
그러나 Rappler가 전면에 나선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마약과의 전쟁'을 비판적으로 다루면서부터였다. 두테르테 정부는 2016년 출범 이후,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수천 건에 달하는 초법적 처형(extrajudicial killings)을 자행했다. Rappler는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취재하고, 실제로 경찰과 민병대에 의해 민간인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된 사례들을 보도했다. 희생자 중 다수는 정식 기소나 재판 없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중에는 미성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리아 레사와 Rappler는 이러한 보도를 통해 국내외 인권 단체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동시에 정부로부터는 강한 반발과 보복을 받기 시작했다. 필리핀 정부는 Rappler를 상대로 여러 건의 법적 소송을 제기했고, 마리아 본인에게도 사이버 명예훼손, 탈세, 외국 자본 수수 등 총 10건이 넘는 기소가 이뤄졌다. 특히 사이버 명예훼손 혐의는 사건 발생 시점보다 해당 법이 제정된 시점이 더 나중이라는 점에서 소급 적용 논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레사는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원칙을 지키며, Rappler의 독립성을 유지했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법적 위협에도 불구하고, 후배 기자들과 함께 언론이 해야 할 일은 진실을 말하는 것뿐이라는 신념으로 Rappler의 운영을 계속해나갔다.
2021년 10월, 마리아 레사는 러시아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와 함께 노벨 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발표되었다. 이는 언론인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은 1935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두 사람은 “민주주의와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위한 표현의 자유 수호 노력”을 인정받아 수상하게 되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발표문에서 “그들이 자국 내 점점 악화되는 언론 자유 환경 속에서도 진실 보도를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수상 당시 마리아는 필리핀 내에서 10건이 넘는 형사 기소와 여러 건의 법정 다툼을 겪고 있었고, 실제로 해외 출국이 불허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녀는 법원의 특별 허가를 받아 어렵게 노르웨이 오슬로의 시청 연단에 설 수 있었다. 연단에 선 그녀는 검은 정장에 금색 목걸이를 걸고, 또렷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연설에서 마리아는 정보 생태계의 붕괴, 특히 SNS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가짜뉴스, 혐오 발언, 조작된 정보를 우선적으로 퍼뜨리는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녀는 이를 “사실에 대한 전쟁(war on facts)”, “허위 정보가 이익이 되는 시대”라고 표현하며, 언론이 이 전장에서 진실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그녀의 연설 중 일부다:
“Without facts, you can't have truth. Without truth, you can't have trust. Without trust, there's no shared reality, no democracy, and it becomes impossible to deal with the existential problems of our times.”
(“사실이 없다면 진실이 없고, 진실이 없다면 신뢰도 없습니다. 신뢰가 없다면 공동의 현실도, 민주주의도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는 시대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룰 수 없습니다.”)
그녀는 연설에서 필리핀의 언론 환경, Rappler의 보도 이후 받은 정치적 압력, 가짜뉴스가 선거와 민주주의에 끼치는 영향, 그리고 무엇보다 언론인으로서의 용기에 대해 조용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We need to help independent journalism survive… We need to hold the line.”
(“우리는 독립 언론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이 연설은 전 세계 언론인들과 학계, 정치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가디언 등 주요 외신은 그녀의 연설을 ‘디지털 독재 시대에 울리는 경종’이라고 평했다.
수상 이후에도 마리아 레사는 Rappler의 편집국을 떠나지 않았다. 필리핀 마닐라에 위치한 Rappler 본사에서 그녀는 매일 편집 회의를 주재하고, 젊은 기자들의 기사 초안을 직접 검토하며 피드백을 제공한다. 기자들은 그녀를 “편집장이자 멘토이며, 동시에 살아 있는 언론 자유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종종 말한다. “진실은 기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시민의 것입니다.” 그래서 Rappler는 단순히 기사만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위한 미디어 리터러시 워크숍, 가짜뉴스 대응 플랫폼, 팩트체크 프로젝트(#FactsFirstPH) 등의 캠페인을 운영하고 있다. 마리아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언론은 시민과 함께 싸워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재판에 출석하고, SNS에서 수많은 협박 메시지를 받고, 국제회의에서 발언하며, Rappler 사무실 책상 위에서 기사를 다듬는다. 그녀는 언론인이지만, 동시에 교육자이자 활동가이며, 필리핀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전선의 시민이다. 그녀의 일상은 평범하지 않지만, 그 일상 안에 담긴 신념은 여전히 단순하다.
“진실을 말할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