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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를 깨끗하게! 암비가와 마리아

by 박준영 Mar 15. 2025

말레이시아의 뜨거운 햇살 아래,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거리는 오늘도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언제나 약속과 배신 사이를 오갔다. 하지만 그 속에서,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정의를 외쳤고, 그중 두 명의 여성이 운명처럼 버르시(BERSIH) 운동의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종족’은 단순한 민족적 정체성을 넘어, 사회적 계급과 정치적 지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 나라는 말레이계가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경제적 영향력은 중국계가, 그리고 인도계는 사회적 주변부에서 존재하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헌법은 말레이계를 특별한 보호 대상으로 설정하며, 정부의 혜택과 정치적 권력은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그 속에서 중국계와 인도계는 정치적으로 배제된 소수자로 살아가야 했다. 특히, 여성이라면 더더욱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버르시 운동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과 부패한 정치 시스템 속에서 태어났다. 2006년, 말레이시아의 선거제도가 심각하게 조작되고 있다는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선거구 조작, 유권자 명부의 부정확성, 공정하지 않은 언론 보도, 그리고 선거관리위원회의 독립성 부족을 문제 삼았다. 이에 맞서 법조계, 시민운동가, 학생,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이 모여 “버르시 1.0”을 결성했다. “버르시”는 말레이어로 “깨끗한”을 의미하며,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 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이었다.


버르시 운동은 한 번의 시위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버르시는 단계적으로 진화하며 말레이시아 시민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생활 시민운동으로 발전했다. 2011년 버르시 2.0이 출범하며 운동의 조직력을 강화했고, 공정한 선거뿐만 아니라 표현의 자유, 정치적 투명성, 그리고 사회 전반의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2012년과 2015년, 버르시 3.0과 4.0이 이어지면서 말레이시아 전역에서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시위대는 단순히 선거 개혁이 아니라, 더 나아가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권력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며, 부패한 정권을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버르시 운동 (출처: the Diplomat)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버르시 운동 (출처: the Diplomat)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2015년, 말레이시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금융 부패 사건인 1MDB 스캔들이 터졌다. 당시 총리였던 나집 라작(Najib Razak)은 국영 투자기금 1MDB에서 최소 45억 달러(약 5조 원)를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 자금은 나집의 개인 계좌로 흘러들어갔고, 해외 부동산, 사치품, 심지어 헐리우드 영화 제작에까지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버르시는 즉각 반응했다. 버르시 4.0 시위는 나집 라작 총리의 즉각적인 사임과 1MDB 부패 스캔들의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며 진행되었다. 1MDB 사건은 국제 사회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고, 미국, 싱가포르, 스위스 등의 정부는 나집 라작의 자금 세탁과 관련된 조사를 시작했다.


버르시는 단순한 선거 개혁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레이시아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부패한 권력을 시민이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암비가 스리니바산(Ambiga Sreenevasan)과 마리아 친 압둘라(Maria Chin Abdullah)는 이 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마리아(좌)의 선거 운동을 돕는 암비가(우) (출처: Malaysiakini)마리아(좌)의 선거 운동을 돕는 암비가(우) (출처: Malaysiakini)


암비가 스리니바산은 변호사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녀는 인도계였고, 말레이시아에서 인도계 여성은 이중의 장벽을 마주해야 했다. 그녀의 부모는 영국 식민지 시절 인도에서 온 이주민이었고, 그녀는 성장하면서 자신의 존재가 사회의 경계선 위에 놓여 있음을 깨달았다. 법을 공부한 이유도 단순했다. 법이야말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본 현실은 달랐다. 법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권력자들의 편에 서 있었다.


변호사협회 회장이 되었을 때, 그녀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주장하고, 말레이시아 정부의 부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하지만 변호사로서만은 이 나라를 바꿀 수 없었다. 법정에서 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역사를 바꿔야 했다.


그녀는 버르시 운동에 참여했다. 2011년, 그녀가 버르시 2.0을 이끌면서 이 운동은 단순한 시민 청원에서 대규모 거리 시위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고, 수많은 시민들이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마리아 친 압둘라는 또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녀는 중국계였다. 말레이시아에서 중국계는 경제적으로는 강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배제된 집단이었다. 그녀는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며 빈곤층 여성과 난민을 도왔고, 점점 더 시민사회 운동에 깊숙이 발을 들였다. 하지만 그녀의 정체성은 늘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그녀는 단순한 중국계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중국계 여성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말레이계가 대부분의 무슬림 인구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슬람을 믿는다는 것은 곧 말레이계가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중국계 정체성을 지켰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말레이시아 사회의 경계를 넘는 것이었고, 그 자체가 도전이었다.


그녀가 버르시 운동에 뛰어든 것은 필연적이었다. 암비가가 버르시 2.0을 이끌 때, 마리아는 그 뒤를 이어 3.0과 4.0을 조직했다. 그녀는 단순한 선거 개혁이 아니라, 소수자와 여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정부는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2016년, 마리아는 체포되었다. 국가보안법(NSA)을 위반했다는 혐의였다. 그녀는 어두운 감방에 갇혔다. 하지만 바깥에서는 그녀의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중국계이면서 무슬림 여성, 그녀의 존재가 이미 이 나라의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국제 사회는 말레이시아 정부를 비판했고, 결국 그녀는 풀려났다. 감옥에서 나온 그녀를 맞이한 것은 다시 거리에서 외치는 시민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심했다. 이제는 정치로 들어가 직접 변화를 만들겠다고. 2018년, 그녀는 총선에서 당선되었고, 시민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버르시 운동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말레이시아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2016년, 버르시 운동은 광주인권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특정 개인이 받은 상이 아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말레이시아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시민들 모두를 위한 상이었다. 암비가는 버르시를 대표해 그 상을 받았고, 다시 말레이시아로 돌아와 싸움을 계속했다.


국제 사회는 버르시 운동을 말레이시아 민주화의 전환점으로 평가했다. 국제인권단체들은 버르시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시민운동 중 하나라고 보았다. 민주주의를 위한 국제 연대가 형성되었고, 버르시는 태국, 인도네시아, 홍콩 등 다른 아시아 국가의 시민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늘도 쿠알라룸푸르의 거리는 분주하다. 정치인들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고, 부패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말레이시아의 민주주의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 그 거리에서 외쳐졌던 한마디가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깨끗한 선거를 원한다!”


그리고 그 함성 속에서, 암비가와 마리아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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